HOME > 설교말씀 > 설교말씀


총 게시물 214건, 최근 0 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5-28 (월) 03:32 조회 : 60
설교일 : 5월 27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슥 3:1-5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슥 3:1-5
지난 목요일이 웨슬리 회심일 이었는데, 올해로 2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우리에게 웨슬리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장로교가 칼빈에 의해 탄생되었고, 루터교가 루터에 의해 탄생 했듯이, 우리 감리교는‘요한 웨슬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적어도 감리교회의 시조가 누구인지는 알아야겠죠.

아마 우리 중에는 기독교는 왜 그리 분파가 많은지 고개를 갸우뚱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개신교는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탄생됩니다.
그리고 그 운동에 쯔빙글리와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도 동참하게 되는데, 그 후 개신교는 신학적인 문제로 루터교와 칼빈교를 나뉘게 되고, 칼빈교는 훗날 장로교의 뿌리가 됩니다.
올 가을 종교개혁 기념주일에는 ‘칼빈’에 대해 함께 나눌 예정입니다. 작년에는 ‘쯔빙글리’에 대해 함께 공부했죠.

우리 감리교회는 그 뿌리가 ‘영국 성공회’에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도 성공회 신부였죠.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 이혼하고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려고 했지만 로마 카톨릭이 이를 반대합니다. 당시 영국의 왕비는 스페인 공주였는데, 스페인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스페인이 세계를 지배했었죠. 그러자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영국에서 ‘성공회’를 만듭니다. 이때가 1534년입니다.

그러니까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등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영국 성공회로 분리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와 로마 카톨릭은 사실 거의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예배당 안에 성화나 성상을 폐기하고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는 정도죠.

 
그러나 메리 여왕이 등극한 뒤에 영국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메리 여왕은 영국의 국교를 다시 카톨릭으로 돌려놓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메리 여왕을 ‘피의 메리’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때 끝까지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지켰던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청교도’라 부르고, 바로 그 청교도의 후손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에 아메리카 땅을 향해 출발하게 되죠.
추수감사절 즈음에는 ‘청교도’에 대해 매년 나누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영국은 계속 카톨릭으로 회귀할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계속 피비린내하는 싸움을 이어가다가 결국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는데, 요한 웨슬리는 1703년에 사무엘(Samuel)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태어나게 출생하게 됩니다.

오늘은 웨슬리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을 중심을 말씀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웨슬리가 6살 되던 해에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목사관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2층에서 자고 있던 웨슬리를 깜빡 놓고 나온 것입니다. 경황이 없어 그랬겠죠. 
그러던 중 2층 창문에서 울고 있던 웨슬리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어깨를 밟고 올라가서 간신히 꺼내는데 성공합니다. 웨슬리를 꺼내자마자 목사관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 사건이 웨슬리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 되는데, 훗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나는 불꽃에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오늘 읽은 스가랴 말씀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실제로 그당시 목사관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입니다.
스스로를 ‘타다남은 부지깽이’라고 했던 그는 훗날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요?

1. 학교를 변화시킨 웨슬리
1720년, 16세의 나이에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1729년 그의 나이 26세가 되던 해에 옥스퍼드 대학 내에 ‘신성 클럽’이라는 써클을 조직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3명의 학생들로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게 됩니다.

신성클럽의 회원들은 처음에는 1주일에 4번 저녁에 모여, 고전과 신약 성서를 원어로 읽고 신앙에 대해 토의합니다.
그러다가 이 모임이 매일 밤 6-9시까지 모이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주 1회 성찬식과 주 2회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쫓아 기도하는 모임으로 성장해가게 됩니다.
또 함께 교도소와 병원을 방문하며 배운 바를 실천하는 일에도 힘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신성클럽 회원들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엄격한 생활을 하였기에,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그들은 ‘메쏘디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메쏘디스트’란 규칙쟁이들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훗날 우리 교단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감리교인들의 특징이 있는데, 감리교인들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시간을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절대로 늦지 않습니다.^^
이렇게 웨슬리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신앙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잔잔한 영향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에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와 이신론등이 거세게 태동하고 있었지만, 웨슬리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문화와 사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열정이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죠.
우리는 여기에서 한 사람의 영향력을 보게 됩니다.
경건을 향한 한 사람의 믿음과 열정이 자기가 속한 학교를 서서히 변화시켜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내가 학교를 변화시킬 거야’... 이런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서야 겠다’는 결단만 있었겠죠. 
그러나 그 결단과 결심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죠.
오늘 웨슬리 회심 280주년을 맞아 우리도 웨슬리 처럼 작은 결단을 마음에 품어 보면 어떨까요!

2. 실패한 웨슬리
그렇게 옥스퍼드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웨슬리는 학교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교수냐 목사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1732년에 미국 조지아주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미국 조지아주로 ‘시몬즈 호’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웨슬리는 다시 한번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시몬즈 호에는 19명의 선원과 80명의 영국 승객들과 26명의 독일 경건주의의 후손인 모라비아 교도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폭풍우 앞에서 떨고 있을 때, 함께 배를 탄 모라비안 교도들은 풍폭속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두려워 떨고 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은 오히려 찬송을 부르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죠.
이때 웨슬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내 믿음은 뭔가?’
그동안 자신은 옥스퍼드에서 믿음 있는 사람으로 불렸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이 경험은 처철하게 낮아지고 부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웨슬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시간을 우리에게도 한 두 번은 허락하십니다. 왜인가요?
새로운 생명은 껍질이 깨고 나와야, 깨져야 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깨짐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그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욥처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는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여 곡절 끝에 조지아주 사바나에 도착한 웨슬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사명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국의 방해로 막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흠모 하고 있었던 ‘소피아 홉키’라는 여인과의 결혼이 불발로 끝나고 말죠.
이 여인과 결혼할 것 인가 말 것인가를 지팡이한테 맡겼다가 큰 낭패를 보았죠.
작년에 나눴던 내용입니다.^^
결국 이 여인의 아버지가 고소를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2년여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깨지는 순간입니다.
앞에서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갔던 ‘믿음의 탑’이 무너지는 경험을 맛보았고, 이번에는 인생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사랑’에서의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는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붙잡고 살았던 내 신념이 무너지고, 심지어 신앙의 토대마져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사업에도 실패하고, 하는 일마다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까요?
이제 웨슬리의 인생은 끝난 것일까요? 

3. 그슬린 나무를 부르신 하나님. 
인생에서도 실패하고 목회에서도 실패한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국한지 3달이 지난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이라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드디어 웨슬리는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에 대해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건져주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였다”
올더스케잇이라는 골목을 걷고 있는데 작은 예배당에서 누군가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을 때 그의 마음안에서 있었던 변화를 적은글입니다.
당시 그가 들은 로마서 서문의 내용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 내용을 읽고 있을 때, 성령님이 다시 식어버렸던 그를 뜨겁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경험은 모세가 광야 가시떨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과 비슷한 경험이었습니다.
모세가 젊었을 때, 자신의 힘과 왕자라는 신분으로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려 했을때,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해야 했듯이, 웨슬리도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미국땅을 밟았다가 철저하게 부쉬진 채 낙심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포자기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나이 80세에 그를 미디안 광야 한 복판에서 다시 부르셨듯이, 그렇게 철저히 부숴지고 낮아진 웨슬리를 1738년 5월 24일에 올더스케잇에서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국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죠.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 이후, 신도회와 속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각 속회에 속장을 세워 속도원들의 영적 상태를 일일이 체크해 가며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모해 가기 시작합니다.
훗날 그 속회가 커져서 교회가 되고 이렇게 해서 우리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죠.
우리가 매달 모이고 있는 속회가 감리교회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예배당이나 속회에서만 성경을 가르친게 아니라 야외설교를 통해 그 당시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영국인들의 가슴에 거룩을 향한 갈망을 불타오르게 합니다.
당시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 그림이 몇 장 있습니다.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사치와 사교에 정신이 팔여 있었습니다. (살롱문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에 지쳐 삶을 포기하며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시장에서는 가는곳마다 닭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노예들이 거래되고 있었고...

그러면 그때 교회와 교회 다니는 신자들은 뭐 하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업혁명이 가져다 주는 물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던 그 때에, 또 빈부의 차이가 극심해가고 있던 그때, 웨슬리는 50여 년에 걸쳐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외치면서 영국을 각성 시킵니다.

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밀수꾼이 자신들의 밀수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강가에서 자살하려던 여인이 웨슬리의 설교를 통해 변화를 받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설교 도중 고꾸라지거나 기절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신음 소리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운타운에 있던 ‘힙포드롬’이라는 극장은 웨슬리의 전도로 더 이상 사람들이 극장을 찾지 않자  극장 주인과 관계자들이 웨슬리를 찾아가서 데모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시 술과 쾌락으로 찌들어가고 있던 영국이 웨슬리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감리교 운동입니다.
웨슬리의 많은 업적 중 가장 큰 업적 하를 꼽는다면, 단연 ‘노예 제도 해방’일 것입니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윌리엄 월버포스’ 의원을 지원하고 격려하여, 결국 영국에서 1807년에 노예무역선이 폐지되고 1833년에 노예 해방이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물결이 프랑스와 미국을 걸쳐 전 세계에 미치게 되죠.

웨슬리는 임종하기 며칠 전까지 윌버포스에게 그를 격려하며 편지를 쓰는데 침대에 누워서 편지를 쓰고 있는 웨슬리의 모습이 스케치로 남아 있습니다. (그림 - 월버포스에게 편지를 쓰는 웨슬리)

훗날 영국의 역사가인 ‘엘리 알레비’는 이런 웨슬리에 대해 이런 역사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당시 영국도 프랑스와 같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유혈 폭동이 발발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였지만 웨슬리의 부흥 운동의 결과 전례없는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웨슬리에 대한 역사의 평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망한 뒤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스라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계속해서 대적하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서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시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슥 3:2)
하나님은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하시면서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지금 사탄은 예루살렘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망했다고... 그러면서 예루살렘의 잘못을 하나씩 꺼내면서 비난하고 있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예루살렘 편이셨습니다. 왜인가요?
예루살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망했지만, 비록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웨슬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서양 한가운데서 믿음이 무너지고, 아메리카 땅에서 사랑에 실패하고 목회의 길이 막혔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웨슬리가 무저지고 있을 때 하나님도 그를 버렸나요?
아니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제사장의 옷을 다시 입혀 주십니다.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이뿐만이 아닙니다. 머리에 관도 씌워 주시죠.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슥 3:5)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를 사용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입니다.
모세를 일으키시고, 욥을 일으키시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일으키시고, 웨슬리를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280년 전에 웨슬리를 붙들어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져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