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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후(1) 베드로와 요한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6-06 (수) 01:31 조회 : 88
설교일 : 4월 15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행 3:11-16

부활 이후(1) - 베드로와 요한


행 3: 11-16


오늘은 부활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이 땅에는 제자들만 남겨지게 되는데, 그 제자들이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아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바로 앞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오늘날로 하면 오후 3시) 기도시간에 맞춰 기도하러 성전을 향해 하고 있었는데 그 길에는 항상 이렇게 구걸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그날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때 그에게 기적이 찾아옵니다.
베드로가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선포와 함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힙니다. 왜인가요?
한평생을 누워서 구걸하던 사람이 일어서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들을 애워싸고 있는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어떤 은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을 바라보자.
베드로가 저들에게 했던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당시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는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를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주목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은 누구를 주목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믿음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깊은 영성이 담긴 설교입니다.
자신을 낮추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는 설교니까요.
우리가 베드로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조금만 일이 잘 되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내 능력을 자랑하며 내 지혜를 뽐내고 싶어 하는데, 베드로도 사람인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인간적인 욕심을 억누릅니다. 왜일까요?
그렇게 내 이름이 드러나면 예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기적은 우리의 권능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경건’에서 비롯된 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던 경건한 사도들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불같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권능의 종들임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지금 이 능력은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다시 반복합니다. 
그렇게 내가 드러나면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만 드러나는 교회, 예수님만 주목하는 교회,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
그렇게 예수님만 바라봄으로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섰듯이,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고, 예수님 때문에 용기를 얻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이유를 찾아가는 교회.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이고, 더욱 그런 교회로 성숙해 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가 시험에 들던가요?
예수님 바라보지 않고 사람 바라볼 때 시험에 듭니다.
예수님 바라보지 않고 목회자를 바라보던가 어떤 장로님을 바라보던가 어떤 권사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면 시험에 듭니다.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사람 바라보며 신앙생활하면 언젠가는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이런말이 있죠. “사람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0)
저는 이것이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교회 용어는 ‘형제’ ‘자매’입니다.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은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오시는 그 날 까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2.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자.
본문 16절에서, ‘도대체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을까?’ 의아해 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으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여기에서 무엇이 그 병자를 낫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평생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이 병자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성전을 방문하셨는데요!
그는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런데 그는 그때 왜 고침을 받지 못했을까요? 왜 변화되지 못했을까요?
맞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복음 전도자 D.L 무디 목사님은 이런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지식을 더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한 책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삐뚤어진 우리의 영성과 인성과 감성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되고 치유되려면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아는 것을 넘어 믿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고침 받습니다. 그래야 치유 받습니다. 그래야 낫습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세주임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대로 회복 시켜 가심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대로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이 말씀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른 사도들도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을 수 있었던 원동력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이름에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심지어 땅 아래 있는 자들도 무릎 꿇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저들은 믿었습니다.

이에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나요?
맞습니다. 예수 이름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치유 받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예수 이름의 권세를 굳게 믿고 나갈 때, 우리를 어둡게 만들고, 시험 들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드는 악한 사단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줄 믿습니다.

3. ‘증인’되자
본문 15절에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다”
이 일은 어떤 일인가요?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심지어 땅 아래 있는 자들도 무릎 꿇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그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000년 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하며 기독교의 산 증인이었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는 바로 우리가 그 일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입을 열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2018년에 예수님의 증인은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찬들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도’를 우리를 통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독교를 들여다 보는 ‘창’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기독교의 창이 되어, 기독교의 증인 되어 착하게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격려할까요?
“당신이 기독교의 창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기독교의 ‘도’로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몇 명이나 전도 되었을까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
놀라운 숫자죠!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어 가는 과정과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맞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먼저 믿는 우리들이 기독교의 ‘창’이니까요.
우리도 우리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믿었던 그 누군가를 통해 지금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요. 

1994년에 나온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카 쉰들러는 돈을 벌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값싼 유대인들을 고용해서 막대한 부를 쌓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 한 뒤, ‘이 사람들을 살려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아우스비츠’로 가게 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체코로 빼내 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말죠.
이 영화 말미에 자신이 구해낸 천여명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쉰들러에게 반지 하나를 선물해 줍니다.

이 반지 안쪽에는 이런 탈무드의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 탈무드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누군가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독교의 창임을 잊지 마시고, 오늘도 주님 바라보며, 예수 이름의 권세를 더욱 굳게 믿으며, 세상을 구하는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