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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7) 친구'요나단'&...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6-11 (월) 03:22 조회 : 23
설교일 : 6월 10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삼상 20:14-17



다윗의 성공(7) - 친구 ‘요나단’ & ...
                                                                                                                              삼상 20:14-17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인 ‘다윗’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눌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목을 보고 좀 의아해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윗(7)이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다윗(1)부터 (6)까지는 2015년에 함께 나누었고, 오늘부터 다시 다윗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까 합니다. 이전 말씀을 듣기 원하시는 분은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설교 폴더 9번을 누르면 3년 전에 했던 시리즈가 나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다.
공감이 되시나요? 그리고 혹 이런 친구가 곁에 있으신가요?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격언에 딱 들어맞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바로 그들입니다.
다윗은 누구인지 잘 아시죠?
이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훗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되죠.
그러면 ‘요나단’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장남이 요나단입니다.
이 둘 사이의 우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하였음이었더라”(삼상 20:17)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둘의 우정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누구인가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뒤, 다윗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자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죠.
앞으로 이 둘 사이의 우정은 어떻게 될까요?
진정한 우정이란, 참된 친구란 무엇일까요?
두 사람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볼까 합니다.

1. 힘들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친구’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깁니다.
18장에서는 다윗이 군대장관이 되고, 사울의 사위가 되죠.
그런데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급반전을 이룹니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여더라”(삼상 18:11)

여기에서 우리는 ‘친구’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서든 뒤에서든 나에게 ‘창’ 던지는 사람이 친구일 수 있을까요?
나에게 창 던지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라면 적어도 나에게 창을 던지지는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죽일 놈’이라 여기며 궁지로 몰아붙이는 순간에도 친구만큼은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 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누가 하신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외우려고 포스트잇에 적어서 모티터 앞에 붙여 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그러면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평가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심판자로 이 땅에 오신게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죠. 바리새인들은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하기 바빴지만...

이것이 친구의 첫 번째 속성입니다.
친구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나에게 창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친구’부터 찾습니다. 왜인가요?
위로받고 싶으니까요.
오늘 본문의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내리 꽂을 때, 그는 궁궐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리고 누구를 찾아갔나요? 맞습니다. 친구 요나단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소연하죠.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삼상 20:1)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찾아가서 하소연 할 수 있는 친구, 들어주는 친구, 언제나 내 편에 되어주는 친구...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행복한 분들입니다.
없다구요.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먼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친구 되어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참 친구이신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이 말씀처럼, 그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내 편이 되어주실 거니까요. 
그 친구가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심에 감사하시며,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 만날 때 제일 먼저 그분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입니다”

2. 친구는 상대방을 존중한다.
요즘 한국에서 ‘갑질’ 때문에 시끄럽더군요.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서류를 내팽게치고, 물컵을 내던지고, 심지어 사람의 몸에 손을 대며 밀치기도 하더군요. 땅콩 때문에 출발하려던 비행기까지 멈춰 세웠죠.
그 분들은 왜 그랬을까요?
맞습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 아버지가 대기업의 회장이니까요.

우리교회 추천도서 목록에 있는 ‘너는 나에게 상처 줄 수 없다’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진정한 친구는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이죠.
다시 말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간관계가 왜 삐그덕 거리던가요?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키려고 시도 할 때입니다.
내 권위와 내 위치로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하려할 때 관계가 틀어지게 되죠.
내가 사장이라고.
내가 아빠라고. 내가 남편이라고. (요즘은 반대의 경우도 있죠)
내가 엄마라고, 내가 아내라고...

데일 카네기가 쓴 ‘인간 관계론’이라는 책에서, ‘가정을 무덤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소제목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우리 가정을 무덤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뭘까요?
“사랑을 파괴하는 데 있어서 지옥의 악마들이 개발한 가장 치명적이고 악독한 방법은 다름 아닌 잔소리다” - 데일 카네기
공감이 되십니까? ^^
그러면서 데일 카네기는 톨스토이를 예로 듭니다.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의 어느날 러시아의 한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죽고 마는데, 바로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톨스토이는 아내의 불평과 잔소리를 피해 한밤중에서 집에서 뛰쳐 나오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82세였습니다. (잔소리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82세 먹은 할아버지도 못 버티는게 잔소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에서 도망쳐 나온 뒤 11일 만에 기차역에서 병들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죠. 
훗날 톨스토이의 부인도 죽게 되는데 죽기 전에 자신의 딸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를 죽게 한 가장 큰 원인은 나였단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렸죠.

이렇게 내 생각과 내 의견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려는 시도는 나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고 상대방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에 우리가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할 때만이 그 관계가 계속 발전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현재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과 요나단을 보십시오.
다윗은 목동이었고, 요나단은 왕자였습니다.
만약 요나단의 마음 속에 ‘나는 왕자인데, 나는 귀족인데, 나는 어디 출신인데, 내 얼굴 색깔은 이런데...’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아름다운 우정이 싹틀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은 다윗에게 인간대 인간으로, 사람대 사람으로 다가갔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죠.
이렇게 우리는 나이를 떠나서, 출신을 떠나서, 성별을 떠나서 상대방을 온전한 한 인격체로 인정할 때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조작하거나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겠죠.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럴 땐 내 생각과 의견과 관점을 솔직하게 제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택과 결정은 누구의 몫인가요?
상대방의 몫입니다. 왜입니까?
내가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남편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없고 아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없고 부모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습니다. 
또 그렇게 내가 억지로 집어넣은 선택이나 결정은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깨우치는 만큼만 변하는 것이니까요.

오늘 본문의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기억하십시다.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둘도 없는 절친이 됐죠.
그리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시고 받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맞습니다. 우리의 참 친구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 되면 사랑해줄게’, 이런 저런 조건이 맞으면 친구로 삼아줄게‘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모습이 어떠하든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다 내게로 오라”
잔칫날 비유를 보면, 골라서 데려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다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여러분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친구가 여러분 곁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3. 친구는 최선을 다해 돕는다.
오늘 본문 20장에는 다윗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요나단의 모습이 나오는데 화살로 사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려주죠.
화살이 ‘이편에 있다’라고 하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않을 작정이고, ‘앞에 있다’라고 외치면 죽일 마음이니 빨리 도망가라는 암호를 짜죠.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을 떠나야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이 확고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다윗을 떠나 보낸 뒤에도 요나단의 노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엔 직언을 고하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상 20:32)
그러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아들인 요나단마져 죽이려했죠.

끝까지 애쓰고 있는 요나단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요나단’의 인품과 됨됨이에 감탄하곤 합니다.
다윗과 끝까지 함께 하잖아요.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과만 함께 한게 아닙니다.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6).
요나단은 다윗도 버리지 않았지만 아버지도 버리지 않은 효자였던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서, 다윗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중에 하나가 이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다윗 곁에는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친구 잘 사귀어야 된다’고 자녀들에게 귀가 닳도록 훈계하고 하셨죠. 
오늘 본문의 다윗과 요나단처럼 내가 먼저 내 곁에 있는 아내나 남편, 부모님이나 자녀, 그리고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면 어떨까요!
 
그런데 다윗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친구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왜요? 사람은 언젠간 떠나가기 마련이니까요. 마음이 떠나든 이렇게 육신이 나보다 먼저 떠나든.
비록 그에게 요나단이라는 친구는 떠났지만 영원히 그와 함께 했던 친구가 한 분 있었습니다.
바로 이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으로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다윗과 한 평생 동행했던 그 분이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저 십자가 위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죠.

오늘 말씀 서두에 이런 화두를 던졌습니다.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혹 이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친구로 삼아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아닙니까!

옆에 있는 가족들, 이웃들,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먼저 요나단이 되어주고, 내가 먼저 다윗이 되어주어 행복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길, 우리의 참 친구 되신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하루하루를 열어가는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