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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8) 여호와께서 금하시니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6-18 (월) 03:56 조회 : 32
설교일 : 6월 17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삼상 26:8-11



다윗(8) - “여호와께서 금하시니”


삼상 26 : 8-11

오늘은 사자성어로 말씀을 열어볼까 합니다.
泥田鬪狗(이전투구)(진흙이, 밭전, 싸울투, 개구)
‘진흙탕에서 개가 싸운다’라는 뜻으로, 볼썽사납게 서로를 물고 물어지는 장면을 볼 때 회자되곤 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에선 ‘지방선거’가 있었죠. 선거 때마다 자주 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다윗의 인생을 함께 나누고 있는데요, 다윗의 인생도 하마터면 ‘이전투구’로 끝날 뻔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랬나요?
맞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관계의 연속이면 좋겠는데, 쉽지 않습니다. 왜인가요?
우리 주변에는 다윗같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사울같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나기만 하면 창을 던지는 사람, 책임지기 보다는 남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사람, 상대방을 평가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내 생명과 감정을 지켜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다윗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1. 최선을 다하라
우리가 잘 알듯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음부터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울은 한평생 여인들이 부른 노래 한 소절을 뛰어 넘지 못하죠.
사울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제발 그 수준을 뛰어 넘어 주면 좋겠는데, 사람이 바뀌는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음을 사울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적으로 돌변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 답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최선을 다합니다.
어느날 사울은 자신의 손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윗을 죽게 하려고 다윗에게 블레셋 남자 100명을 죽이면 자신의 딸 미갈을 주겠다고 제안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삼상 18:27)
백명을 원했는데 이백명을 채우죠.

신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39-41)
이 말씀을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자의 윤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그런데 이렇게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를 더 고상한 말로 요즘은 ‘공감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공감력은 어떤 능력 일까요?
내 입장만 고수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이해해 보려는 마음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 한번 서보고,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 한번 서보는 것.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에 서보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입장에 서보는 것.
아들은 아버지의 입장에 한번 서보고, 아들은 아버지의 입장에 서보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서보게 되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가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다윗이 사울 곁에 남아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다윗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은 자신의 환자였죠. 사울은 정신병력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럴때마다 다윗이 자신의 음악으로 그를 치료해주곤 했죠. 
그리고 사울은 키는 컸지만 자존감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 부르려 하자 짐보따리 뒤로 숨었었죠.
이렇게 사울의 인생을 이해하려고 하면 지금 사울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여인들의 노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우리도 다윗처럼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성이면감천’이라는 말이 있죠.
바라기는 우리도 그렇게 조금씩만 더 이해해주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이해하며 삽시다”

그러나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안되고 죽어도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될 때도 있죠.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2. 피하라.
앞에서 봤듯이 다윗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목숨 걸고 나가 싸워서 사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면서 비유를 맞춰줬죠.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사울의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 걸요.
심지어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다윗을 죽이겠다고 창을 던지죠.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내 나름대로 참고 인내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만 줍니다. 뉘우치기는커녕 그 강도가 점점 세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울이 던지는 창에 맞아 그냥 죽어야 할까요?
그럴 순 없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렇게 내 생명이 다치는 것 까지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요. 내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했습니다.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삼상 19:10)
다윗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피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사울을 피한 것이 이번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삼상 19:12)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신혼방에 군사들을 보내죠. 이번에는 창문을 타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사울이 쫓아오자 이번에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피하게 되는데, 그래도 계속해서 쫓아오자 하는 수 없이 블레셋으로 망명하죠.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0)

그렇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하면 피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해드렸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계속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강도가 점점 세지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냥 두면 점점 무례해지죠.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지금 상대방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인’이 박혀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무례한 언행이 인 박히게 되었을까요?
셋 중 하나입니다. 아무에게도 제지 받지 않는 환경에 둘러 쌓여 있거나(재벌들, 재벌2세들), 스스로 인격 도약을 위해 아무런 노력하지 않거나, 원래 그런 성품을 타고 났거나. 

최근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어선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불행 피하기 기술”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은 훈련으로 연마할 수 있지만 사람의 기질은 변하기가 어렵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매년 12월 31일이 되면 나와 아내는 우리와 잘 맞지 않았던 사람들,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작은 쪽지에 적어서 차례로 불태워버린다”
조금 매정해 보이지만 저자는 왜 이런 의식을 매년 치르는 것일까요?
짧은 내 인생을 그런 사람들에게 허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그런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이 책의 제목처럼 내 인생이 불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만약 다윗이 사울을 피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이에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눅 9:5)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물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윗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자들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변화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맞습니다. 그럴 때는 피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조금 있다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법원에서도 이혼하려고 할 때 곧바로 이혼을 허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을 시간을 갖게 하죠. 그렇게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통해 각자 자신을 더 깊이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이전보다 더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도 하죠.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방인처럼 내쳐서 신앙에 대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간이 그를 깨닫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 안될 때는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그래야 상대방도 살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을 죽이면 사울은 살인자가 되죠.
따라서 하실까요! “피해야 할 때는 피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 맡겨라
그렇게 피하기만 했던 다윗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어떤 기회인가요?
맞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그에게 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사울이 군사들과 함께 다윗을 쫓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동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굴에 누가 숨어 있었나요?
맞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었죠. 하필 그 순간에.
그러자 다윗의 군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울을 처리해 버리자고 합니다.
그때 다윗이 자신의 군사들을 말리죠. 그리고 조용히 다가가서 그의 옷자락만 베 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또 다른 기회가 찾아 옵니다. 이번에는 사울이 다윗을 쫓다가 지쳐서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이에 다윗의 군사들은 또 사울을 죽이자고 하죠.
그러나 다윗은 이번에도 이렇게 말립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 26:11)
여러분, 다윗은 왜 사울을 살려줬던 것일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무엇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왕.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대상이 더 확대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이렇게 높여주셨죠.

이에 오늘 말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심판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신다는 말씀으로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사는 것을 금하십니다. 왜인가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금하셨던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속한 권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권한에 속한 일일까요? 맞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4:15)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판장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왜 친히 원수도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손에 피 묻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시니까요.
우리가 우리 자식들이 꽃길만 걸어가는 모습 보고 싶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기니까요.
손은 안으로 굽기에 정의롭고 공평한 판결을 내릴래야 내릴 수 없죠.
이에 다윗은 하나님께 맡기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10)

혹 여러분도 사울같이 힘든 사람이, 사울같이 짜증나고 힘든 일들이 여러분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내가 심판장이 되어 심판을 내리고 판결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십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다윗의 인생길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다윗을 본받기를 갈망하는 우리의 인생길에도 함께 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