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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9)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6-25 (월) 03:08 조회 : 22
설교일 : 6월 24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삼하 6:12-15



다윗(9)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삼하 6:12-15


오늘은 피카소의 작품으로 말씀을 열어 볼까 합니다.
어떤 동물이 연상되시나요?
피카소가 처음 스케치한 대상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변하죠.
오늘 이 그림에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주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본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번 ‘다윗’ 시리즈를 준비해 가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왜 다윗을 좋아하셨을까?’
반대로 다윗의 관점에서, ‘다윗은 절망할 수 밖에 없던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멈추지 않았을까?’ ‘다윗은 왜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을까?’
요즘 새벽마다 시편을 한 장씩 나누고 있는데 새벽에 나누고 있는 시편과 오늘 본문에서 저는 이에 대한 몇 가지 답을 찾았습니다.
다윗 이라는 사람의 ‘본질’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었을까요?

1. 믿음 - 사람은 뭔가를/누군가를 믿으며 산다.
다윗이 쓴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는 단연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어떤 책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침몰하는 배,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는 무신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지 공감이 되시나요?
지난봄에 구약의 맥에서 공부했던 요나서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죠. 그 배가 어떻게 됐나요?
풍랑으로 인해 파선할 지경이 됩니다. 그러자 선원들이 배 안에 있던 모든 값진 물건들을 다 바다에 내 던지죠. 그래야 배가 조금이라도 더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있던 신을 향해 기도드립니다.
그때 배 맨 아래층에서 누워 자고 있던 요나를 찾아 선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6)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믿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는 이렇게 절체절명의 순간에 밝혀지게 되죠.
그러면 다윗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누구를 믿고 있는지는 언제 밝혀졌나요?
다윗이 그의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첫 번째 장면이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맞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입니다.


이 때 골리앗이 다윗을 향해, “네 시체를 새의 밥 되게 하겠다”고 위협하며 달려들었죠.
그때 다윗은 어떻게 대응하며 나가 싸웠나요?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 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바로 이 외침 속에 다윗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그의 ‘본질’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비록 여전히 내 삶은 가시밭길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골리앗 같은 원수들이 들끓는 세상이지만 그런 정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보호하실 거라는 믿음.
확실히 믿기는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기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그 답을 사울과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형들을 찾아온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하죠.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리이다”(삼상 17:37)
이를 통해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릴적에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물려 받았고, 그 신앙은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을 물리치면서 점점 강해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보게 됩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싹틉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 먼저 믿는 우리 부모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은 부모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같이 나만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형들이 많이 있었죠. 그러나 다른 형들의 신앙도 다윗처럼 믿음이 강했나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무엘을 앞을 지나갔던 형들 가운데 다윗보다 더 좋은 믿음의 아들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선택하셨겠죠.
똑같은 아버지, 똑같은 어머니 밑에서, 똑같은 신앙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를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다윗 안에 있었던 ‘본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2018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도 인생길에서 사자의 발톱도 만나고 곰의 발톱도 만나고, 골리앗도 만나기도 하지만, 다윗처럼 끝까지 그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 손 놓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골리앗같이 자신의 창이나 칼이나 힘이나 덩치를 믿는게 아니라 다윗처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사랑 - 사람은 뭔가를/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
재미있는 질문 한 가지를 드릴까합니다.
먼저 남자분들께 묻겠습니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물속에 빠졌습니다. 누구를 구하시겠습니까?
여성분들께 묻겠습니다.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물에 빠졌습니다. 누구를 구하시겠습니까?
아주 어려운 질문이죠! (저는 그냥 죽을랍니다.^^ 어짜피 안 구해줄 것 같으니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사랑하며 삽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는 앞에서 본 ‘믿음’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일 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1965년 나온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오더군요.
“놔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
심순애는 이수일과 김중배 사이에서 결국 김중배를 선택했죠.
아니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하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선택하며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해서 모아 놓은 바구니 속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선택 앞에서 흔들릴 때 강한 도전의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냥 그럭저럭 흉내만 내고 있기에 너무 답답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주일 성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다면 30년 40년 교회 다녀도 십일조 드리는 것,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마땅한데, 내가 지금 이 자리 앉아 주는 것이/ 내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뭔가 굉장한 서비스를 해 드리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녀에게 젖을 먹이면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하고 있는데...’라는 손해 보는 마음으로, 계산적인 마음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왜 아이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자신을 내어주나요?
맞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만약 댓가를 바라거나, 계산적인 마음으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면, 그 행위에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거룩한 단어를 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을 연구하면서 깊이 묵상했던 바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
여러분, 하나님은 왜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요?
훗날 사도행전의 저자는 다윗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래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시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그의 혈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왜일까요?
하나님이 다윗을 이렇게 귀히 여기시며 그를 인류를 구원할 통로로 사용하신 것은, 그의 중심을, 그의 본질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이새의 다른 아들에게 기름 부으려고 했을 때 막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러면 다윗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봤듯이, 어머니는 자식에게 아낌 없이 자신을 내어 줍니다. 배고파 우는 아이 앞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보실까요!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삼상 17:9,10)
누가 누구한테 외치고 있는 소리인가요?
맞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고 있는 사울과 사울의 군사들은 지금 뭐하고 있나요?
무서워서 서로 눈치만 보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른 나가서 어떻게 좀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죠. 
바로 그때 다윗이 나와 이렇게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다윗은 왜 그랬을까요?
왜 이렇게 무모해 보이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갑옷도 없이 칼도 없이 나가서 싸우는데, 여러분 왜일까요?
그냥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이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
그리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중심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히고, 기독교의 가치들은 훼손되고, 심순애처럼 하나님을 헌씬짝처럼 버리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확실히 믿기는 다윗의 그 마음이,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셨던 그 중심이 우리에게도 있는 줄 믿습니다. 더욱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겸손 - 사람이 되어가는 통로.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다윗에게도 실수하는 장면에 몇 번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죠. 그리고 여부스성을 점령하고, 그 성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바꾸고, 그곳에 자신의 왕궁을 세웁니다.
그 뒤에 맨 처음 한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성을 지은 뒤 다윗이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나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이 갑자기 중단되고 맙니다. 언약궤가 소 달구지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에 손을 대었기 때문입니다.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죠.
그러자 다윗은 겁을 먹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윗성이 아니라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에게 잠시 맡깁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머물러 있던 그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 6:11)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언제 하늘의 복이 우리집에 임할까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 올 때 임합니다.
훗날 이 가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대상 26:8)
오벧에돔의 후손이 몇 명입니까? 62명입니다.
그런데 다 능력있는 자들로 그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역대상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벧에돔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훗날 ‘성전 문지기’로 일하게 되죠.
하나님의 언약궤를 석달 동안 모셨는데, 그 석달의 기간이 한 가문의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문들마다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모셔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연구합니다. ‘그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때 내가 놓친게 뭘까?’ 요즘 말로 하면 ‘복기’를 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언약궤를 소 달구지에 끌고 왔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소 달구지에 실어서 끌고 갈 성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떻게 운반해야 하나요?
맞습니다. 레위인들이 메고 가야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일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원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함을 여기서 깨닫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석 달 뒤 이렇게 자신의 성, 다윗 성에 모셔 옵니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삼하 6:12)
역대상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및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대상 15:27)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뀌어가고 성장해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울은 40년 동안 사무엘이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다윗은 다르죠.
훗날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하게 되고 선지자 나단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어떻게 했나요? 철저히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죠.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여러번 찾아가 권면했음에도 결국 바뀌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바뀌고 어떤 사람은 바뀌지 않을까요?
그 답이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하나님은 온유한자, 다시 말해 겸손한자, 심령이 가난한 자를 지도하고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왜인가요?
마음이 거만한자, 교만한 자는 지도해도, 권면해도, 가르쳐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막 4:9)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를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리라”(잠 9:7)
“거만한 자를 징계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8:8)
오늘 다윗이 자신의 실수를 복기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성, 다윗 성에 모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 갈 수 있었던 통로였고, 그의 본질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다윗의 그 본질, 그 통로가 항상 열려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피카소의 이 ‘황소’로 말씀의 문을 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다 걷어내니까 ‘본질’만 남았죠.
오늘 나는 어떤 본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칭함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