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 설교말씀


총 게시물 220건, 최근 1 건
   

다윗(10) 밧세바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7-02 (월) 04:24 조회 : 52
설교일 : 7월 1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삼하 11:1-5



다윗(10) - 밧세바

삼하 11:1-5

오늘은 오랜만에 사자성어로 말씀을 열어볼까 합니다.
反面敎師(반면교사) -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면에서 교훈을 얻는다”
사람이 완벽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밝은 면도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죠.
오늘 읽은 본문만 없었다면 다윗은 거의 완벽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됐을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장면이죠!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시험에 빠진걸까요?
다윗의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1. 틈을 주면 안된다.
오늘 본문 1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삼하 11:1)
여기에 다윗이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실수가 나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농번기가 끝나고 농한기가 된 것입니다. 추수가 끝나서 군량미도 넉넉합니다. 그래서 왕들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왕들이 전쟁터로 나가고 있을 때 다윗은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
1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삼하 11:1)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지금 사무엘서의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디에 있어야 했나요?
맞습니다. 지금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있어야 했습니다.
랍바에서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다니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니까 여지없이 사단이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기억하십시오. 마귀는 항상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단은 뿔달린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듯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고 달콤한 것’들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 편에 서는 것인 냥,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인냥...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범하게 하죠.

그렇게 다윗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자 다음 장면이 이어집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삼하 11:2)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삼하 11:2)
그때 누가 보입니까?
밧세바가 아름다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전등도 없던 시절인데요.
다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이 때 남자 눈에는 모든 여인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몰래 보고 있는데, 어떤 여인인들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걸 ‘관음증’이라고 하죠. 몰래 훔쳐보려는 심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심리중 하나입니다.

사단이 노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날 밤에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겠죠. 왜인가요?
지금 전쟁중인데 잠이 올 리가 없죠. 
그렇다면 어짜피 잠도 편히 못 잘 걸, 애초에 처음부터 그가 있어야 했던 그 자리에 가 있었더라면 오늘 이런 유혹을 받지 않았겠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 아침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주일날 아침에 여러분이 이어야 할 이곳에 없으면 여러분 마음이 편하던가요?
뭔가 불편하죠. 목사님이나 사모님한테 전화나 문자나 카톡오면 뭐라고 변명할지... 속장님이 전화하면 뭐라고 할지... 머리가 복잡해지죠 ^^
어짜피 마음이 편치 않을 걸 이 자리에 앉아 있는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편치 않아야 정상입니다.
왜요?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라면 성령님이 그냥 두실리 없으니까요.
주일을 빼먹었는데 마음이 편안하다? 죄송하지만 성령님이 떠난 분일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상처주고 무례한 말을 밥먹듯하면서도 전혀 마음에 꺼직함이 없다?
이 또한 성령님이 떠난 분일지 모릅니다.
왜인가요?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터치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성령님의 만짐이/터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성령님이 떠났다는 증거겠죠.

기억하십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민생활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고, 바쁘고 힘들지만 내가 있어야 할 그 장소, 그 시간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가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힘들 때 있지만 그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왜인가요?
오늘 이야기에서 보듯이 사단은 반드시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이곳 한 장소에 부르신 것에는 뭔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
이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렇게 권면하죠.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뭔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지킵시다”

2. 거짓은 더 큰 거짓을, 악은 더 큰 악을 불러온다. 
결국 다윗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그로 인해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죠.
다윗이 어떻게 했나요?“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내니”(삼하 11:6)
밧세바의 남편을 급히 불러온 의도가 있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아가 집에 안들어 가는 것입니다. 왜 안들어갔나요?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참 충직한 신하죠!
그러자 하루를 더 머물게 한 뒤 밤새도록 술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돌려보내는데,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군사들과 함께 자죠.
결국 다윗은 어떻게 하나요?
요압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삼하 11:15)
자신의 죄를 또 다른 죄로 덮으려 하고 있죠.
한번 거짓말을 하게 되니까 그 거짓말을 점점 커지고, 한번 죄에 빠지니까 그 죄가 다른 죄까지 불러들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무서운 장면이죠!

자라는 곡식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알곡을 뿌리고 있지만, 동시에 사단의 종들 또한 가라지를 뿌리고 있죠.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는 지금 영적 전투 중에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한마디로 지금 ‘땅 따먹기’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적에 친구들과 바닥에 선 그어가면서 땅따먹기 놀이 해 보셨죠!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곡식’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라지’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도 자신의 생명력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지만, ‘거짓’도 자신의 생명력을 확장시켜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치열한 영적 전투 현장 한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내 안에서 두 존재가 싸우고 있다고 고백하죠.
그리고 내 안에 ‘진리’가 이길 때도 있고, 또 가끔은 ‘거짓’이 이길 때도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둘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은 누굴까요? 맞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 안에는 흰 말도 뛰어다니고 있고, 검정말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말에게 먹이를 주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애석하게도 다윗은 계속해서 누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요?
맞습니다. 계속해서 ‘거짓’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끊어야 하는데, 끊지 못하고 계속 해서 거짓과 악에게 먹이를 주니까, 더 큰 ‘거짓’과 더 큰 ‘악’으로 빠져들죠. 악의 힘이 점점 세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결국 이 말씀 대로 다윗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게 되죠.
제일 먼저 우리야가 죽는데 우리아만 죽은게 아니라 우리아가 죽을 때 여러명의 군사들도 죽게 됩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도 태어난지 8일 만에 죽게 됩니다.
밧세바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밧세바라는 한 여인의 인생도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겠죠.
그러면 다윗은 괜찮았나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영성과 인격과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죠. 그리고 남은 인생 이 모든 죄 값을 다 치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됩니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불러오고, 악은 더 큰 악을 불러 온다는 사실.
그래서 내 대에 끊어야 합니다. 우리 가문에 흐르고 있는 어두운 기운들을 끊어내야 합니다.
이 땅 시카고에, 이 땅 교회들 속에 숨어 들어와 있는 악령의 세력들/ 갈라짐과 분란과 불순종의 영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민 1세대의 못난 모습들과 기질들을 2세까지 물려줘야 되겠습니까!
저도 우리 가문에서는 이민 1세대니까 이런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끊지 못하니까 다윗의 못난 모습들이 그의 아들들에게까지 내려가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거짓과 어둠의 흐름을 끊을 수 있을까요?
감사하게도 구약의 다윗에게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한 모든 저주를 끊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처음은 40일 동안 기도하시면서 사단과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하죠.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중에 귀신과 악령들을 쫓아내신 장면들이 많은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5:8)

혹 여러분 안에 아직도 어두운 것들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문에 아직도 우울하고 칙칙하고 쓸데 없는 근심과 걱정을 몰아가는 이상한 기운들이 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문을 아직도 어떤 특정한 병이나 중독이 지배하고 있거나 부정적인 감정이나 통제되지 않는 분노의 흐름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장악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그 모든 악령과 귀신과 어두움을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음으로 믿으시고, 담대하게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할 일 없는 삶’이 복된 삶이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것입니다. 회개(悔改) : ‘죄에서 돌아서는 삶’ ‘죄를 죽이는 삶’
여기서 한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후회는 그것이 보고 있는 대상이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후회의 결말은 우리를 자기 연민이나 우울함이나 깊은 죄책감으로 몰고 가지만, 회개는 우리를 자유와 해방으로, 기쁨과 빛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후회는 우리를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회개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후회가 아닌 회개를 통해 빛으로 인도함 받고 주님의 제자로 성숙해가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회개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
이 말씀은 먼지가 많은 중동 지역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먼지 나는 땅을 밟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습니다. 중동은 발도 씻어야 하죠. 먼지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손과 발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흙먼지가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다윗이 오늘 있었던 일을 회개하면서 지은 시가 몇편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2)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혹 아직까지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거든 속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있다면 속히 푸시기 바랍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빨리 회개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할 때.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회개할 일 없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절)
사후 처리보다 아예 후회하고 회개 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것이 더 좋겠죠.
그리고 그 길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이 말씀의 유익입니다. 죄짓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심으로 회개할 것 없는 삶을 사는 복된 인생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자성로 말씀을 열었습니다.
反面敎師(반면교사) -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면에서 교훈을 얻는다”
힘들더라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지키십시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 이름으로 권세로 악한 사단의 진과 요새를 파하십시다.
회개할 것 없는 삶을 사십시다.
그 삶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삶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말씀 안에 있는 그 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