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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11) 인구조사 왜 했을까?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7-09 (월) 05:25 조회 : 74
설교일 : 7월 8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삼하 24;9-13



다윗(11) - 인구조사, 왜 했을까?


삼하 24:9-13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지만, 반대로 그들의 ‘실수’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수와 못난점을 하나도 가감없이 밝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믿는 우리를 위해서이겠죠.
오늘 본문은 다윗의 두 번째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뭔가요? 맞습니다. “인구 조사, 왜 했을까?”입니다.
다윗은 왜 인구 조사를 실시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왜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인구 조사 이면에는 이런 인간의 못된 속성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권력욕(權力慾)
지난주부터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 있는 선배 목사님이 선물로 보내준 책인데, 미뤄두고 있다가 이제야 펼쳐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는 두꺼운 책을 몰아서 읽곤 하는데요, 지난 한 주는 이 책과 씨름하며 보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 톰슨’은 인류의 역사를 ‘노동’, ‘성’, ‘권력’이라는 세 단어로 풀어내고 있는데요, 권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헝가리의 어느 영주의 이야기를 한 예로 들고 있더군요.
“영주 자리에 오르고 나니 그 아래로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권력욕에 대한 얄팍한 민낯이 이 한 줄에 담겨 있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고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갑질’하고 싶은 욕망이 인간 깊숙한 곳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세 명만 모여도 금방 상하 관계가 형성되고, 정치적인 계산이 왔다갔다하게 되죠.
그래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이 ‘호모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입니다. 정치적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어느날 다윗이 군대장관 요압을 불러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삼하 24:2)
이스라엘 북쪽부터 남쪽까지 이스라엘 전체 인구를 조사해 오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요압에게 인구를 조사해오라고 명했던 것일까요?
숫자를 세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숫자를 세어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한마디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가늠해 보고 싶었던 거겠죠.
예전에는 숫자가 곧 국력이었죠. 특히 농경시대에는 숫자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가능하면 많이 낳아야 했습니다. 보통이 7남매, 8남매였죠.
물론 지금은 숫자에 대한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인구는 국력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되려면 최소한 1억명은 돼야 한다고 하죠. 그래야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구가 3억이나 되니까요. 이 안에서 생산과 소비가 자체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인구는 몇 명인가요? 5천만 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구조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오늘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도 죽고, 이젠 싸움을 걸어올 만한 나라도 없기에 내가 이루어 놓은 왕국의 국력이 얼마쯤 되나 헤아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자기를 높이고, 우쭐대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그를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고 있었던 거죠. 
오늘 하나님이 다윗을 벌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목적이 이것이 아닌데, 지금 다윗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권력에 집착하는 것을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영국의 정치가인 ‘액튼 남작’이 남긴 명언이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끝이 있던가요?

로마의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입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디투스 장군’의 아버지죠.
네로황제 다음을 이은 황제이고, 콜로세움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 최고의 걸작 ‘콜로세움’을 만들었던 그도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투덜댔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사진과 함께)

여러분, 이것이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권력’의 민낯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내가 내뱉고 있는 말투와 억양과 표정에 그대로 스며 나옵니다.

마셀 로젠버그가 쓴 ‘비폭력 대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원만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다음 3가지 종류의 말은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1. 도덕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는 말 : “너는 그게 문제야” “너는 게을러”
2. 비교하는 말 : “옆집 애는 이러이러하는데 너는 그러니”
3.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부정하는 말 : “너는 꼭 ...를 해야만 해”
권력지향적인 우리의 본성은 이렇게 ‘말’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 지향성은 항상 폭력을 동반하죠.
언어 폭력, 신체 폭력, 요즘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성폭력의 문제까지.

오늘 하나님이 다윗의 인구조사를 책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권력과 힘에 대한 욕망은 반드시 ‘폭력’을 불러올 것이 때문입니다.
자연과 동물을 향한 폭력, 사람에 대한 폭력을 넘어 하나님을 대항하는 폭력까지.
 
오늘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어떤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까?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사위에게, 며느리에게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사랑과 배려의 대화가 넘쳐나는 우리 교회, 우리 속회, 그리고 우리 가정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결과도 중요하지만 동기는 더 중요하다.
결국 군대장관 요압은 다윗의 명령대로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아홉 달만에 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삼하 24:8)
아홉달하고 20일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삼하 24:9)
북쪽 남쪽 다 합해서 몇 명입니까? 130만명이죠. 대단한 숫자입니다.
20살 넘은 성인 남자들만 그랬다는 것입니다. 아내까지 더하면 250만이 넘죠. 거기에 자녀까지 더하면 한 가정에 3명씩만 낳는다 해도 금방 천만명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당시 셋 만 낳지는 않죠. 야곱은 12명을 낳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2천 9백년 전에 성인남자만 130만명이라는 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최강대국 반열에 들어서 있었던 것죠. 좋은 결과입니까? 나쁜 결과입니까?
맞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결과가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결과를 못마땅하게 여기신 것일까요?

그 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던 장면과 오늘 이 장면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인구조사를 최초로 실시한 때가 언제였나요?
맞습니다. 출애굽 할 때입니다.
시내산에 도착한 모세는 인구를 조사하게 되죠.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민 1:3)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성막을 지으려면 물자가 필요한데 각 지파의 형편에 맞게 배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분명해집니다. 모세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구조사는 어떤가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조사였죠.
똑같은 인구조사였지만 그 동기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실시했던 두 번째 인구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광야 세월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지에 모여서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게 되는데, 민수기서 26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민 26:2)
이번에도 무엇 때문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있나요?
맞습니다. 이제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제부터는 가나안의 거인족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와는 그 동기가 확연히 다르죠!

그러면 그렇게 모세 때 실시한 인구조사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1차 인구조사 :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명이었더라”(민 1:46)
2차 인구조사 :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된 자가 육십만 천칠백삼십 명이었더라”(민 26:51)
모세 때 실시된 두 번의 인구조사는 60만명이었습니다.
자, 모세와 다윗의 인구 조사의 결과를 놓고 비교해볼까요?
60만명(모세의 인구조사) vs 130만명(다윗의 인구조사)
누가 더 좋은 결과를 보고 있나요?
맞습니다. 결과로만 보면 다윗 시대의 인구 조사가 모세 시대의 인구 조사보다 2배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둘 중 어떤 결과에 손을 들어주시나요? 맞습니다. 모세입니다. 왜일까요?
결과도 중요하지만 동기는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과나 외모만 보지만 하나님은 동기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윗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항상 내 안에 있는 동기를 검증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가?
정치적인 계산이 이면에 숨겨져 있지 않는가?
말은 모두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강요하기 위해서 그런 데이터만  뽑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라기는 결과도 좋고 동기도 좋은 일로만 가득한 우리의 인생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 동기는 순수하고 좋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은 심는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보듯이 혹 내가 거두지 못하면 누가 거둘까요?
맞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심어놓은 씨앗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실까요! “결과도 중요하지만 동기는 더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는 이렇게 권력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권력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정치적인 동물인데, 우리 안에 있는 이 권력욕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그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예수님의 권력을 추구하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력을 포기하거나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을 추구하십시오. 권력을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말고 애쓰고 노력하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추구하라고 명령하신 권력은 이런 권력임을 잊지 마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권력의 방향성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권력의 방향과는 전혀 다르죠. 세상과는 역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

저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역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권력을 연습하고 실습하는 곳.
그리고 그 권력의 정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권력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 만이라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우리 가정은 얼마나 더 아름답고 살만한 세상이 될까요!

하나님은 남자를 여자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보다 더 섬세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나는 위치는 누군가에게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고, 어머니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고 할머니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고 시아버지라는 위치가 그럴 수 있습니다.
장인 장모님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 위치가 누군가를 강요하고 억압하는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고 누군가를 섬세하게 돌보며, 내 인생의 노하우와 지혜가 자연스럽게 이웃과 후손들에게 흘러나가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에서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칫 교회의 직분이 폭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왜 교회에서 직분제를 허용했을까요?
교회에서의 직분은 세상이 추구하는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권력이 어떠함을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개는 점점 어떻게 될까요?
맡습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교회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번에 몇몇 분들과 함께 교회 동영상을 하나 만들고 있는데, 우리교회에 등록하신 분이 우리교회의 장점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이렇게 답하셨더군요. ‘네이퍼빌연합감리교회는 장로님들이 솔선수범하는 교회다’라고.
바라기는 우리교회가 이곳 시카고에서 더욱 그런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 또한 바로 그런 가정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우리 공동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