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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성숙(6) 기술을 연마하라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8-10-19 (금) 22:26 조회 : 61
설교일 : 10월 14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딤전 4:13-16



성장과 성숙(6) 기술을 연마하라

딤전 4:13-16절

계속해서 성장과 성숙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텃밭을 가꾸는 집들이 많은데, 어떻게 지난 여름 수확이 괜찮았습니까? 저희도 지난 여름에 오이랑, 고추랑, 깻잎을 심었는데 올해는 그런대로 농사가 잘 됐습니다.
그런데 텃밭을 가꾸면서 깨닫는 것은, 텃밭 가꾸는 것도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간 땅만 버리는 수가 있죠!

산속에서 한 노인과 한 젊은이가 열심히 도끼로 나무를 찍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누가 더 많이 나무를 쓰러뜨리는지’ 내기를 합니다.
체격이 건장한 청년은 제일 좋아 보이는 도끼를 들고 열심히, 쉬지 않고 찍어 댑니다.
그런데 반대쪽에서 나무를 찍고 있던 노인은 가끔 그루터기에 앉아 쉬면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노인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맞습니다. 노인은 도끼질 하다가 힘에 부치면 그늘에 앉아 쉬면서 도끼날을 갈고 있었습니다.
둘 중, 누가 먼저 나무를 쓰러뜨렸을까요?
맞습니다. 노인입니다.
이유가 뭔지는 아시겠죠! 
 
오늘은 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도끼날을 연마해야 합니다. 무뎌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무뎌진 도끼날로는 나무를 쓰러뜨릴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도끼날이 무뎌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1.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논어 ‘술이’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가운데 좋은 것은 가려서 그 점을 따르고 그 가운데 좋지 않은 점은 가려서 그 점을 고친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성경에 왜 이렇게 낯 뜨거운 이야기가 들어 있나요? 좀 빼 버리시지”
다윗과 밧세바 같은 장면이 나오면 얼굴이 뜨끈뜨끈 하죠! 조금 실망이 되기도 하고요.
여러분, 왜일까요? 성경에 왜 그런 내용까지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좋을 것을 보면 그대로 배우고, 나쁜 것을 보면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함을 배우라고. 

우상 숭배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의 멸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왜 무시무시한 심판이나 멸망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 걸까요?
성경을 읽는 우리는 그렇게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세상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그런데 우리도 알면서도, 보면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많죠!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심지어 잠언에는 이런 것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 30:24-28)
우리 눈에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미물이라도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배울 점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개에게도 배울점이 있죠. 개에게는 어떤 배울 점이 있을까요?
리더십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동물이 개라는 것을 아는가?”
그렇죠. 개는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삽니다.
개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긴 있죠. 주인 보면 꼬리쳐주고 웃어주는 것.
그러면 주인이 밥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심지어 똥도 다 치워주죠. 겨울에는 옷도 입혀주고...
그런 장면 볼 때마다 이런 옛 격언이 떠오르더군요. “개 팔자가 상팔자다”

우리교회 추천도서인 ‘강자의 조건’에 나오는 내용을 잠시 소개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으셨는데요, 아직 못 읽어보신 분들은 꼭 읽어 보십시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유투브에 영상으로도 나와 있으니까 꼭 보십시오.
한때 오스만 트루크는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을 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도 오스만 트루크에서 발명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스만 투르크가 얼마나 강한 제국이었냐면, 동로마와 서로마가 나눠진 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입니다. 서기 1453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천년의 고도, 콘스탄티노플을 무엇으로 함락시켰을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우르반 대포입니다.(8.2 미터, 19톤, 500킬로그램의 돌덩어리, 사륜마차 서른대, 소 60마리. 200명의 병사가 필요함)
그런데 그렇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 오스만 제국은 급속도로 쇠락해버리고 맙니다.
왜일까요?

이 대포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포를 옮겨서 발사 준비 하는데만 한나절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한 발 쏘는데 한 나절이 걸리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대포 크기에 안주하며 200년 동안 유럽과 담을 쌓고 있을 때, 유럽은 그 200년 동안 작고 기동성이 있는 대포를 만들어 냅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무너지죠.

이것이 역사를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입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나라,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 정책을 썼던 나라는 모두 다 망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우리 나라죠.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을 때 일본은 어땠습니까?
똑같은 시기에 일본은 젊은 인재들을 모아 유럽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앞서가고 있던 서양의 문물을 배워오게 했죠. 1863년에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아시아 최고 국가가 됩니다.
반면에 조선은? 망했죠. 

여러분, 어떤 사람이 성장할까요?
뭔가를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사람이 성장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어떤 사람이 성장하지 못할까요?
맞습니다.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만 갇혀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성숙할 수 없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들도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인 신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죠.
그들도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죠. 

바라기는 우리교회에 몸 담고 있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은 항상 뭔가를 배우려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잃지 않는, 열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사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라도 더 배웁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2. 겸손한 사람이 배운다.
‘겸손’ 우리 기독교의 핵심 가치 중 하나죠.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은 그리 만만치 않은 단어입니다.
앞에서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맞습니다. 저들은 적어도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이유중 하나가 이것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당시 유대인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헤롯왕궁에 사는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오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 출신입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인 내가, 사두개인인 내가, 예루살렘 출신인 내가, 어떻게 새파랗게 젊은 나사렛 촌놈한테 가서 배우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내가 너보다 더 똑똑하고 좋은 학교 나왔는데... 나도 너만큼은 아는데... 나는 박사인데...

우리의 배움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만”
내 안에 있는 이런 교만들이 꺽이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줘도 저들은 배우려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저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죠.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뻣뻣한 교만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호 7:10)
엘리야, 엘리사, 요나 아모스, 호세아등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타이르고 일렀건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움크리고 있는 교만이 꺽이지 않으면 어떠한 변화도, 어떤 성장도, 어떤 성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에 속한 모든 형제 자매님들은 주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집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깨져야 한다.
자식들 가운데 꼭 그런 녀석은 한 둘 있습니다.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안하는 녀석. 
학교에서도 그렇죠. 각 반에 꼭 선생님 말 안듣는 녀석 한 둘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봐서 알기에 알려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는데, 그렇게 가르쳐 줘도 고집을 꺽지 않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저 같은 경우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한 두 번 말했는데도 안 들으면 그건 어쩔 수 없죠.
결국 사람은 자신이 깨닫는 만큼, 또 깨닫는 대로 사는 거니까요.
내가 대신 깨달아 줄 수도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기도 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그냥 내버려 두면 한참 뒤에 깨닫죠.
그때 아빠가, 엄마가 일러준 방법대로 할껄!
그때 선생님 말씀대로 좀더 열심히 공부할껄!

이는 내적인 성장과 성숙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 안에 뭔가 새로운 것, 좋은 것이 들어오려면 이전에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을 먼저 버려져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고집이 꺽여져야 합니다. 깨져야 합니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방식들, 생각들, 사고들이 다 부셔져야 합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부셔지고 깨져야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터를 닦을 수 있으니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닥아 둔 것 외에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우리는 모두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터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모퉁이 돌이라고 말씀하고 있죠.
“기록된 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눅 20:17)
모퉁이 돌은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그 돌을 기점으로 토대가 쌓아집니다.

이제부터는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다시 쌓아 올려야 합니다.
기준이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모든 것이 이 모퉁이 돌에 맞춰지죠. 모난 것은 깍여지고, 높은 것은 잘라지고...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8)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모통이 돌 되신 예수님 위에 떨어져서 깨지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쓰임받는 도구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모퉁이 돌에 맞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하라는 말씀이죠.
알아서 이 모퉁위에 떨어져서 깨지던지, 아니면 맞아서 가루가 되던지.
그리고 이것이 인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를 보면, 큰 돌이 하나 날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단 2:45)
하루는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꿈을 꾸게 되죠. 그래서 나라의 모든 점쟁이들을 다 불러서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고 내가 무슨 꿈을 꿨으며,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라고 명령합니다. 점쟁이들이 난처했겠죠. 꿈이 뭔지 알아야 꿈을 해석하던지 말던지 할텐데, 꿈을 알려주지도 않고 해석하라니요!
그런데 그 꿈을 알아내고 해석해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때 느브갓네살이 꾼 꿈은 이것이었습니다.

큰 신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머리는 금으로, 팔과 가슴은 은으로, 배와 허벅지까지는 동으로, 종아리는 철, 발가락은 철과 진흙으로.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돌이 하나 날아와서 이 신상을 산산조각 내 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제국들을 다 깨졌죠.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지금은 어느 시대일까요? 지금은 열 발가락 시대입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성경공부에 들어오십시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8)
그날이 허망한 날 되지 않으려면, 그날이 가루로 흩날리는 날이 되지 않으려면, 모퉁이 돌에 맞아 깨지지 않으려면, 그전에 어서 회개하고 다듬어지라는 말씀입니다.
혹 우리 안에 아직 깨지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주 앞에서 완전히 깨지고 부셔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곡식으로 드려지는 ‘소제물’이 맷돌에 갈려서 부드럽고 고운 가루로 드려졌듯이, 그렇게 깨지고 갈려질 때 우리 삶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산제물이 되게 될 줄 믿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부분도 있겠죠. 그렇다면 결단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결단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전 10:5)
순종이 안되는 것이 있다면 사로잡아 무릎 꿇혀 복종케 하라는 것입니다.
왜인가요?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니까요.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혹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깨지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바울의 이 권면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뵙는 그날이,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의 역사를 후려치는 그날이, 하나님께 많은 것으로 올려드리는 날 되고, 또 상급받는 날, 칭찬받는 날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