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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예수는 역사다(1) 정말로 죽으셨는가?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9-04-16 (화) 07:55 조회 : 9
설교일 : 4월 14일
설교자 : 박관우 목사
본문말씀 : 마태 21:33-39

예수는 역사다(1)
정말로 죽으셨는가?

마 21:33-3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죠.
이번주와 다음주에 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변증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고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낱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취급하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예수님은 과연 메시야이실까요?
예수님은 과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까요?
맞다면, 무엇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1. 헤롯 대왕의 반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옵니다. 왜였나요?
왕을 경배하기 위해 별을 따라 왔죠!
박사들을 만난 헤롯은 자신도 경배할거니까 왕이 어디에 나셨는지 알려달라고 하죠.
그러나 간밤에 천사가 박사들에게 나타나서 헤롯에게 알리지 말고 다른 길로 가라고 합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헤롯은 대노하며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이 장면에서 잠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헤롯 대왕이 이렇게까지 반응한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아기입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겠죠!
그런데 헤롯 대왕은 그 아이를 향해 이런 반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뭘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 보여지고 있는 헤롯대왕의 반응은 예수님이 이 땅의 진짜 왕으로 오셨음을 반증하고 있는 장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이 한권 있습니다. 리 스트로벨이 지은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입니다. 2002년에 나온 책인데, 1,400 만권이나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리 스트로벨은 시카고 트리뷴지 기자였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최연소로 트리뷴지에 입사해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죠!
법을 전공한 저널리스트인데 얼마나 냉소적이겠습니까!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기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하고 있는 시카고 트리뷴지에는 이런 글 귀가 벽에 써 있다고 합니다.
if your mother says she loves you, Check it out.
“네 엄마가 너를 사랑한대도 확인해 봐라”
‘사실’만을 추구하는 신문사 기자의 직업정신이 엿보이네요.
이런 곳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리 스트로벨’ 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로 인해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되죠.
결국 ‘리 스트로벨’은 아내의 신앙이 허구임을 밝혀내서 아내를 기독교에서 구출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성경이 허구이고, 예수 이야기가 날조된 신화이고, 예수님의 죽음은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사건이고, 예수 부활은 집단 최면에 걸린 몽상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책들과 이론을 섭렵해가면서 연구합니다.
예일대 법대 출신인데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겠습니까!
그때 그가 가장 많이 참고했던 책은 1985년에 결성된 ‘예수 세미나’라는 단체에 속한 학자들이 발간한 책들이었답니다. ‘예수 세미나’라는 단체는 철저하게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비판하고 예수님을 부정하는 거의 모든 이론과 사상은 ‘예수 세미나’에서 나오는 이론들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예수님을 반박하는 이론으로 무장한 채, 이제 각 대학을 찾아다니면서 14명의 신학자들과 대결을 펼쳐 나가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헤롯 대왕이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는 성서 고고학의 대가인 휘튼 대학의 ‘존 맥레이’ 박사와 치열한 토론을 하게 되는데, 토론해 가면서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헤롯 대왕은 잔인한 왕이었다. 자신에게 잠재적 위협 요소인 것처럼 보이면 다 죽였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까지 죽였다. ”- 존 맥레이
헤롯대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기 아내 ‘미리암네’를 죽입니다. 장모 ‘알렉산드라’도 죽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루스’도 죽입니다. 
그런 헤롯이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헤롯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임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마 21:37,38)
여기에서 아들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뒤에 나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마 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잡고자 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왜 이렇게까지 반응했을까요? 저들은 당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인데.
만약 예수님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예수 세미나’에서는 예수님은 단지 선생중 하나였거나 병을 잘 고치는 의사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단지 선생 중 하나였다면 첩자까지 보내서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진 않았겠죠!
이에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38,39)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예수교’라는 종교가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얼마 못가서 망할 것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그냥 내려두지 않고 있죠! 심지어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당안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이 고치는가 안고치는가 함정을 파 놓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경계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1,22)
예수님은 단지 랍비 중 하나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병을 잘 고치는 의사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고향 사람들도 놀랍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4,55)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그 숫자가 다 합해봐야 500명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시골에서 자랄 때 옆집 숟가락 젓가락 숫자도 알고 지냈죠!
그렇게 예수님을 속속들이 다 아는 동네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런 가르침과 그런 기적들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유대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놀라고 있는 것일까요?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한 장면만 예로 들면, 네 친구가 지붕을 뚫고 침상에 중풍병자를 메달아 예수님 앞에 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러자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수근거리죠.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말씀하신 성인이 있었나요?
공자가 이런말을 했습니까? 석가가 이런 말을 했나요?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문서를 보셨나요?
없습니다. 역사상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서기관들이 수근대고 있듯이, 하나님 말고는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리 스트로벨은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도날드 카슨’ 박사를 만납니다.
에즈베리 신학교의 ‘벤 위더링턴’ 박사도 만납니다.
심리학 박사인 ‘게리 콜린스’ 박사도 만납니다.
물론 그 전에 ‘예수 세미나’에서 나온 내용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의 정신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뭐 이런 내용들을 섭렵한 뒤에 찾아가죠.
그러나 난상 토론 끝에 이런 제목으로 한 쳅터를 씁니다. “하나님처럼 살고 하나님처럼 용서함”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셨기에 용서도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행한 치유와 기적이 증명하고 있죠.
유대인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누구셨는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십자가 처형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유대인들은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죠. 왜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마 21:37,38)
그래서 저들이 생각해 낸 처형법이 ‘십자가’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 받은 자’라는 유대 율법이 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 했던 것이고, 십자가 처형은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처형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밟아 뭉개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구세주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묻어버릴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부터 이런 이상한 사상들이 나오기 시작했냐면 기원후 2세기 부터입니다.
신비주의에 물든 이단들이 등장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니었다는 이상한 사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앞에서 언급한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그런 생각들이 암암리에 기독교계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죽은게 아니다. 약을 먹고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리 스트로벨은 이런 ‘예수 세미나’에서 나온 이론으로 무장한채 일리노이 쿡 카운디의 검시관으로 2만번 이상 시체를 검시한 경험이 있는 ‘로버트 스타인’ 박사와 남켈리포니아의 ‘알렉산더 메드럴’ 박사를 찾아갑니다.
이들을 통해 십자가 처형이 어떤 것인가가 서서히 벗겨지게 되는데 십자가 처형은 이렇게 진행 됐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로마 채칙에 맞으셨는데, 로마 채칙에는 납조각들이 끝에 묶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내려칠 때마다 등가죽이 패이거나 갈라져버립니다.
로마 태형을 연구했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그래서 태형을 맞다가 기절하거나 심지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태형을 맞으셨는데 잠시 기절해 있었거나 스스로 최면을 거신거다?
말이 안되는 주장이죠!
당시 로마의 태형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더 끔찍한 사실은 그 상태로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움직일 때마다 무겁고 가칠한 나무결이 상처에 충격을 줬겠죠. 그러면 더 벌어지고 더 찢어지고...

그리고 이제 십자가 위에 못 박히게 되는데, 손바닥에 박지 않고 손목에 박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면 무게로 인해 손바닥이 찢겨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목에는 ‘척골 신경’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척골 신경이 뭐냐면, 가끔 모서리에 팔 뒤꿈치를 부딪히며 ‘짜릿’하죠! 손목 중앙은 바로 그 척골 신경이 지나가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메드럴 박사’는 그 고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펜치로 그 신경을 비틀어서 뭉갠다”

그 상태로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두 팔이 벌어져 있기에 횡격막이 들려져 있어서 제대로 숨을 쉴 수 가 없습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발에 힘을 주고 몸을 세워 일으켜야 하는데, 발에 힘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못에 체중이 실리기에 두 발 위에 박혀 있는 못 주위의 살과 뼈가 더 넓게 으스러집니다.
동시에 갈라진 등은 거친 나무결에 더 깉은 상처를 내고,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몸에 있는 모든 피는 조금씩 조금씩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처형법이 십자가 처형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약을 먹고 기절했다가 살아났다고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군인이 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옆구리를 찔렀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이 장면을 ‘메럴드 박사’는 ‘늑막삼출’이라는 전문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저혈량 쇼크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게 되는데 그러면 심장 주위에 액체가 고이게 된다고 합니다.
창으로 찌르니까 액체와 피가 같이 쏟아져 나온 가죠.
요한이 정확히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죠!

그러면 로마 군병은 왜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을까요?
로마 군사가 창으로 찌른 이유는, 만에 하나 사형수가 살아나오면 자신들이 그 사형수를 대신해서 처형당하기 때문입니다. 
죽었는지 다시 한번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죠!

당시 십자가 처형은 이런 과정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하신 이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으니까요. 온전한 모습으로.
아니 ‘온전’을 넘어 ‘영화’된 모습으로.
고문당해서 절뚝거리는 모습이나, 어깨가 탈골된 모습이나, 좀비같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부활을 믿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사순절 마지막 한 주,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니까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