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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8월 속회공과 - 지켜내는 용기(2)

글쓴이 : 네이퍼빌교 날짜 : 2018-08-05 (일) 00:07 조회 : 156
18년_8월_-_지켜내는_용기_2_.doc (349.2K), Down : 4, 2018-09-07 03:32:11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동안 가장감사한 일은?

2) 지금까지 살아오면서그때 잘했다고 생각되는 결정은?

* 성경 - 삼상26:6-12

* 말씀나눔 : 지켜내는 용기(2)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27:17) 이를 위해 예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신 뒤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나 하나 예수님 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영성을 키워가고,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성이 다듬어져가고, 책과 음악과 영화와 예술과 같은 도구를 통해 감성을 돌봐가며 참 사람됨의 의미와 존재를 추구해 가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한국교회의 영성, 그 어느 나라보다 높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압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어떻습니까? 전 세계에서 부패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을 가장 심하게 하고 있는 민족이 우리 한국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이혼율과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또한 우리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인구의25%가 기독교인이고, 이민자 70% 이상이 교회나 성당에 다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통계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왜일까요?

고등학교 다닐 때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여자 집사님은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섰던 분이셨습니다. 금요일, 토요일 마다 저희와 함께 목이 쉬어라 철야 기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영서(靈書)까지 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가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직장 동료와 눈이 맞은 것이 남편에게 발각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주일학교에서 그 집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눈빛에서 깊은 어두움과 슬픔을 보았습니다. 그 우울한 눈빛은 저에게 강하게 물었습니다. ‘기독교가 뭔가?’함께 철야하고, 함께 방언하고, 함께 떡국 끓여 먹으면서 밤을 새워 성경을 같이 연구했었는데...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그분이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줬던 신앙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입을 열 때마다주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았던 분인데...

저는 그때부터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하나님께 방언을 거두어가 주시고 대신 말씀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방언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강조하는 은사 주의자들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본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이런 저의 경험을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시대에 기독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 길로 부르셨을까요?

현재까지 제가 얻은 답은 이것입니다. ‘참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원래 계획하셨던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이 추구해야 할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영성을 키워가고, 인성을 다듬고, 메말라 가는 감성을 돌보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인적인 삶의 변화와 성장을 추구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점점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어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중 하나가 인간관계입니다. 앞에서 본 잠언의 말씀처럼, 사람의 인성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듬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혹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누군가와 부딪힐 때도 있고,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혹 그럴지라도 신앙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입니까? 내가 다듬어지고 성숙해져서 품격 있는 사람 되라고 이곳으로 불러 주셨는데, 지금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면 그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리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1. 기회인가? 유혹인가?

오늘도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데, 다윗은 사울이 굴에 들어갔을 때 얼마든지 사울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살려줬죠! 나중에 다윗이 자기를 살려줬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6,17) 사울이 다윗을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사울이 다윗을 아들같이 대했을까요?

이제 오늘 본문인26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삼상 26:2) 사울이 다시 3천명의 군사들과 함께 다윗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일까요? 아들 삼을려고? 아니면 군대 장관의 자리로 다시 복권 시켜주려고? 아니었죠!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은 절대 믿을 대상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여러분, 사람 믿지 마십시오. 사람 믿으면 언젠가는 실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믿으면 언젠가는 실망합니다. 물론 초신자였을 때는 나를 전도한 그 사람의 관계 때문에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랑은 멀어지고 누구랑 가까워져야 합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성령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장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앞에서 ‘내 아들아’라고 말했던 그 사람이 지금 26장에서는 다시3천 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상처가 되고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 일을 모른다’고,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이 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을 찾아 헤메다가 지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때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이 순간이 기회일까요? 유혹일까요?

심지어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옆에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도 없으리이다 하니(삼상 26:8)

다시 묻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기회’일까요? ‘유혹’일까요?

조금 어렵죠! 분명 기회인 것 같은데, ‘기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 기회인 것 같은데, 기회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2. 분별하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사랑하는 속원 여러분,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성령의 지혜를 구하십시다.그래야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기회인지 유혹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셉도 그랬죠! 보디발의 아내가 다가왔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출세의 길로 보여 질 수도 있으니까요.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보내준 산해진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몸도 보신(保身)하고, 왕의 총애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것이 기회인지, 유혹인지를 판가름 할 수 있을까요?

 

3. 하나님의 영광인가? 영광인가?

오늘 다윗이 사울을 헤치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조용히 가지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는 영광이 될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금 당장 사울을 처치해 버리자는 아비새에게 다윗은 이렇게 호통칩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우리도 어떤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오늘 다윗처럼 한번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 생각대로, 내 성질대로 해버리기 전에 한번쯤은 잠시 멈추고 그 일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렇게 행동하는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지 가로 막는 일인지를 한번쯤은 묵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 그렇게 사울을 처단하지 않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하고 바보같은 선택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이 결심은, 훗날 그의 왕국이 계속 이어져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때, ‘지금 기회다’라고 마음먹고 사울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면, 다윗의 부하들 또한 다윗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윗의 아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반란을 도모해서 언제든지 쉽게 왕을 끌어내리려는 마음을 먹었을 것이기 때입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역사와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훨씬 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왕의 숫자는 남유다 보다 배나 많습니다. 왜일까요? 계속해서 왕들이 장군들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수시로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속원 여러분, 분별해 내십시다.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기도해보고 생각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4:8)

분별력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나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를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결단의 기도

1. 분별력을 주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

2.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 속원들을 도와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 속장

*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