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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2월 속회공과 - 자유(3) 비판자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8-12-02 (일) 07:15 조회 : 33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말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은 적 있나요?

* 성경 - 7 1-6

* 말씀나눔 : ‘비판자’로부터 자유(2015 3 2주 주일설교)

 

우리는 어릴적부터 다른 사람 욕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는 비판하는 소리, 정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화목해야 할 가정에서 아내가 죽어갑니다. 남편이 죽어갑니다. 자녀들이 죽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들이 죽어갑니다. 형제자매들이 죽어갑니다. 교회의 원조(元祖)격인 속회에서도 속원들이 죽어갑니다. 왜 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모두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 누군가의 영혼이 죽을 수도 있음을 항상 인지(認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속회에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말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누군가의 ‘비난’과 ‘정죄’로 인해 힘들어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 받고, ‘그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돼지에게 내 인생을 걸 필요는 없다.

유대교 격언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할 것이다. 그 한명은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을 싫어할 것이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이 좋은 벗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남은 일곱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예수님의 삶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이 누구였나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과는 피가 다른 이방인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족(同族)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회당에서 예배드리던 ‘서기관들과 율법교사들’이었습니다. 성전에 머물고 있던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서서히 숨통을 조여갔습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 ‘왜 세리랑 밥먹느냐’고 시비걸고, 회당에서 병자를 치유하면 ‘다른 날에 고치지 왜 하필 안식일에 고치냐?’고 시비걸고, 손 씻지 않고 빵을 먹으면 ‘왜 너희들은 손도 안씻고 밥을 먹냐?’고 핀잔주고, 금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는데 당신네들은 왜 금식하지 않냐?”고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왜인가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렇게 입만 열면 다른 사람 욕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지쳐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힘이 빠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상조차 그런 교회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며 설래설래 고개를 젓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일까요?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마음의 안식을 찾고, 삶의 위로를 받아야 할 주님의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왜 ‘교회’의 ‘교’자만 꺼내도 인상을 찌푸릴까요? 사람들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뭔지 너무 알고 싶어서 며칠을 고민 하다가, 잠언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18:8). 남의 허물을 들추며 험담하는 일은 고소하고 새콤하고 달콤한 별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이 한번 그 맛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던가요? 또 찾게 되죠. 중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아예 비판과 정죄가 입술에 ‘인’이 박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래도 비판하고 저래도 비판합니다. 이 정권도 비판하고 저 정권도 비판합니다. 이 사람도 정죄하고 저 사람도 정죄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작 본인들은 본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간혹 얼마간 잠잠해진 것 같아 보이다가도 몇 주 못가서 또 원상태로 돌아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저절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어느 때까지 입니까?”울어도 않되고, 힘써도 않되고, 참아도 않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든, 사회생활을 하든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은 꼭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해야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자유 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6)

조금 매정해 보이는 말씀인 것 같지만,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내가 죽으니까요.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나를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보호해준단 말입니까!

물론 순교의 사명이 있거나 시대적인 사명이 있다면 그렇게 밟히고 찢기다가 순교해야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대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도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만 해대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만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뒤에서 뭐라고 욕하든. 

이에 솔로몬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9:7,8)

혹시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是非) 걸면서 피를 말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질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예수님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5:39)고 하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을 가십시오. 돼지에게 내 인생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2. 건전한 비판과 충고는 수용하라.

우리 중 이런 질문을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그러나 비판이나 충고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맞습니다. 모든 비판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드는 건강한 비판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분별력”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건전한 비판이고 건전한 충고일까요? 건전한 비판에는 관심과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건전한 비판은 자존감에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조직을 발전시키는 건강한 회의는, 난상토론이 몇 시간씩 이어간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그 누구도 인격이 짓밟히고 있다는 모멸(侮蔑)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몇 년전 한국에서,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떠들었다고 선생님이 몽둥이로 학생들의 허벅지를 때려서 시퍼렇게 멍들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가 항의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사랑의 매”였답니다. 사랑해서 그랬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하십시다. 건전한 충고와 비판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상처나 흉터를 남기지 않습니다. 무례(無禮)하지 않습니다. 인격을 짓밟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의 비판과 충고를 하고 있습니까? 혹 내가 내뱉고 있는 비판과 충고 속에는 피멍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혹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숨 막혀하지는 않습니까? 내 입에서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나 ‘충고’가 나가려고 할 때 반드시 이 문구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거든 입을 다물라

성경에도 수많은 비판과 정죄들이 나옵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무서운 심판의 말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약에도 ‘형제가 잘못을 범했을 경우, 두 세 사람이 가서 그를 권면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권면과 비판에는 반드시 들어가 있는 공통 분모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스며있는 비판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등대와 같습니다. 사랑이 녹아 있는 충고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끕니다. 사랑이 들어간 정죄는 우리를 참된 회개로 이끕니다. 잠언에 나오는 말씀처럼, 철이 철을 더욱 날카롭게 하듯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 철에는 반드시 사랑의 가루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독약이 아니라. 건전한 비판과 충고는 수용하고, 사랑이 아니거든 입을 다뭅시다!

3. 에너지를 충전 받으라.

비판자에게서 자유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 비난을 무시하며 내 길을 가던지, 아니면 그 비판을 수용하던지 - 어떻게 반응하든 거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에 우리는 어딘가에서 혹은 누군가로부터 계속해서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에너지를 충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장로님이나 권사님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타인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 처녀 비유를 보면, 호롱불의 기름이 떨어져가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이렇게 대답죠.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25:9) 이때 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호의를 베풀지 않았던 것일까요? 내 호롱불에 담겨 있는 기름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무한한 에너지의 근원을 찾아서 그곳에 빨대를 꽂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일까요?

맞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주님입니다. 성령님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와 영생수를 마시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하십니다. 그 주님께 나아가 오늘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마르지 않는 에너지를 공급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자 하셨던 ‘참 자유’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평강이 우리 가정과 속회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우리 속회와 교회가 말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2. 상처와 아픔 속에 있는 속원들을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속장

*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