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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3월 속회공과 - 자유(6) 열등감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9-03-01 (금) 03:58 조회 : 8
2019년_3월_속회공과.doc (423.6K), Down : 0, 2019-03-01 03:59:18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어떤 열등감 때문에 힘드신 적 있나요?

* 성경 - 3:16

* 말씀나눔 : ‘열등감’으로부터 자유 (2015 2 4주 주일설교)

 

제아무리 멋있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저마나 나름대로의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른 민족보다 더 열등의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다른 사람의 이목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우리 동양에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우리 동양문화권에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동양에서 처음 등장한 때는 ‘바바 고쵸우’라는 일본 사람이1894년에 쓴 [유수일기]를 통해서입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인류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개인은 확실히 썩어가는 것인가?

그래서 결혼도 개인 간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 간의 결합이었죠.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양가 부모님들 끼리 만나 자식들의 결혼을 결정하곤 했었죠! 물론 사회 전체를 중요하시는 문화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여러 가지 역기능들도 양산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려고 하는 ‘열등감’입니다.

 

1. 누구도 열등하지 않다. 단지 다를 뿐이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100%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중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사랑받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말하는 것 마다 항상 100% 옳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인 황 희 정승 집에서 실재 있었던 실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하루는 두 하녀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첫 번째 하녀가 정승을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하소연합니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황희 정승이 이렇게 답합니다. “네 말이 옳구나”. 그런데 잠시 뒤 두 번째 하녀가 찾아와서 자신의 사정을 울먹이면서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도 옳구나”.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승의 부인이 하녀들이 다 나간 뒤 정승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영감, 이 사람도 옳다, 저 사람도 옳다하시면 누가 진정으로 옳은 것입니까?”그러자 황희 정승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당신 말도 일리가 있구려”라고 대답했답니다.

일상생활 중에 가끔 피곤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우겨대면 정말 답이 안나오죠! 그럴때는 정말 기도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객관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100% 객관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에 오염되지 않은 100% 순수한 객관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상호주관성’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이라는 단어는 상호간의 합의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의 관점을100% 객관적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신만 옳다’고 고집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신약에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굉장히 독단적이고 고집이 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죠.

그런데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 이렇게 바뀝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9)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사람이 이렇게 바뀝니다. 유대교가 아닌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했던 고집불통의 사나이가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힘센 사자만 ‘좋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토끼를 보고도 ‘좋다’라고 말씀하셨고, 참새를 보고도 ‘좋다’고 말씀하셨고, 들에 있는 들꽃을 향해서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만들어 지던 날 우리를 보시면서,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던 날 여러분을 보시면서 “심히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2.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라

열등감을 독일어로 ‘Minderwertigkeitsgefühl(민더베르티히카이트게필)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치가 적은 느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열등감은 ‘스스로를 가치 없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열등감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느끼고 있는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감정이라는 것 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키가 ‘크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키가 ‘작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키가 크고 작은 것의 기준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나의 기준입니다.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은 다 키가 큰 것이고,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다 작은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해석’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철학자 ‘헤겔’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음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이성을 향해 쉽게 열리던가요? 쉽게 열리지 않죠! 너무 쉽게 열리면 좀 문제가 있죠^^ 그리고 그런 사람이랑 살면 삶이 좀 피곤해집니다. 마음의 문,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 꽃도 선물하고, 한밤중에 창가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별의 별 이벤트를 다 열지 않습니까!

열등감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은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쉽게 여러분 마음에 틈타지 못하도록 여러분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아무나 여러분의 감정을 헤집고 다니지 못하도록 여러분 안에 내공을 쌓으십시오. ‘내강외유’(內剛外柔)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심히 좋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누가 나를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나를 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나를 이 지구 전체만큼이나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요!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고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시 않는다고요? 그러면 좀 어떻습니까!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인정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욕심입니다. 그리고 제아무리 훌륭한 부모님도 우리를 완벽하게 사랑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인가요?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니까.

이에 우리는 성인이 되어가면서 참 부모를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야 함'을 ‘거듭나야 함을’강조하신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리에게 아버지가 생기고 어머니가 생기듯, 우리는 거듭 태어남을 통해 우리의 ‘참 아버지’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가면을 쓰지 않아도 사랑하십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하십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이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우리 자신을 존중하고, 또 옆에 있는 가족들과 지체들도 존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3. 선한 도구로 승화(昇華)시켜라.  

일본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나소닉’이라는 메이커도 그가 만들어낸 회사 중 하나인데, ‘감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나는 집이 몹시 가난했다는 것을 감사한다. 가난했기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 고생을 통해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한 것이 성공에 도움이 되었다. 둘째는 나는 건강하지 못한 몸에 대해 감사한다. 건강하지 못했기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건강을 위해 항상 운동에 힘써 늙어서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는 나는 못 배운 것에 감사한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무엇이든 배우려는 겸손함을 가지게 되어 그것이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가난이 우리에게 열등감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한 몸이 우리를 열등감으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내 자존감을 계속해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열등감’이라는 단어에 끌려 다니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십시다. 자신감을 가지십시다. 열등감이라는 악을 나를 발전시키는 선한 도구로 바꾸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도 육체의 커다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점을 위해 세 번씩이나 목적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주님의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의 약점을 제거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NO'라는 응답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우리에게 가난이라는 열악한 환경을 경험하게 하신 이유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측은한 마음을 같게 하기 위함은 아닌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연약한 몸과 병을 주신 이유가, 그렇게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하기 위함은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아픔과 상처를 허락하신 이유가,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도구 삼으시려고 나에게 미리 맛보게 하신 것은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53:5)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승화되어 가기를, 그래서 주님이 그토록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참 자유’가 오늘 우리 안에 임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약함이 강함 되게 하소서.

2. 어려움 속에 있는 속원들을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속장     

*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