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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4월 속회공과 - 자유(7) ‘타자’(他者)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9-04-07 (일) 04:33 조회 : 9
19년_4월_-_자유_7__타인으로부터.doc (379.4K), Down : 0, 2019-04-13 23:14:50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드신 적 있나요?

* 성경 - 갈라디아서5 1

* 말씀나눔 : ‘타자’(他者)로부터 자유 (2015 3 4주 주일설교)

 

자의든 타의든 ‘타자’에게 속박당한 채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타인에게 강요된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는데,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할까요?

 

1. 인생의 의미는 에게 부여한다.

김춘수의 “꽃”라는 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19)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을 만드신 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부른 바로 그것이 그것들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주도성’(主導性)을 우리 인간에게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타자’(他者)에게 끌려 다녀야 한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과거에 끌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끌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에게 끌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이나 어떤 사상에 끌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점에 끌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에 끌려 다닙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이화여대 명예 교수인 ‘이근후 박사’가 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1935년생이니까 현재 84세가 되셨네요. 두 아들과 두 딸, 그리고 손자 손녀와 함께 13명이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며느리가 시집오자 제일 먼저 가르친 첫 번째가 뭐였냐면 ‘거절하는 법’이었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억누른채 무조건 ‘예’만 한다면 서서히 마음속에 앙금이 쌓여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당번을 정해서 저녁을 준비하는데, 당번 때가 되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은 요리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바빠서 힘들면 배달 시켜 먹어도 되고요. 그러던 어느날, 그날은 자신이 당번이어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슬그머니 옆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얘야 너 오늘 당번 아니잖니? 나 도와주려고? 그럴려면 당번을 왜 정했겠니. 시아버지 당번 때 도와주고 시어머니 당번 때 나서고 신랑 일한다고 거들면 너는 계속 식사 당번해야 한단다” 그러자 며느리는 얼른 손을 털고 주방에서 나가더랍니다. 참 멋진 시아버지죠!

그 분 얘기를 조금 더 하면, 은퇴 한 뒤 여기저기서 모셔가려는 단체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이름도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부르는 곳이 많았겠죠! 그런데 그는 다 거절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막 은퇴했는데, 또 다시 어떤 단체에 얽매이며 시간을 축내기에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얻은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로운 직함을 다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짧은 인생을 타자에게 얽매여 살다간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 일인가!

사랑하는 속원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타자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제일 먼저 ‘삶의 주도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2.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포기하지 말자.

개구리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둘이 같이 폴짝 폴짝 뛰어 놀다가 그만 우유통에 ‘풍덩’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아 나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치며 이내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개골 개골’우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울며 신세 한탄만하다가 허연 배를 하늘에 드러낸 채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달랐습니다. 똑같이 우유통에 빠졌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이리저리 헤엄치며 발을 열심히 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몇 시간을 살기위해 발버둥치자 우유가 점점 뻑뻑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우유가 진흙같이 굳어가는 느낌이 왔습니다. 발길질로 인해 우유가 서서히 치즈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결국 두 번째 개구리는 폴짝 뛰어서 우유통 밖으로 튀어 나올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내 생각대로 풀리지도 않고, 내 계획대로 되지도 않을 때 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현실은 막막하기만 할 때 있습니다.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꽉 막힌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아직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첫 번째 개구리와 같은 비관주의적인 관점으로 살 것인가?’아니면, 두 번째 개구리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시도해 볼 것인가?’우리는 이 두 번째 개구리의 관점를 ‘낙관주의’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잠깐 ‘낙관주의’(樂觀主義)와 ‘낙천주의’(樂天主義)를 설명하고 넘어가려 하는데요, 낙천주의는 뭐냐? 낙천주의는 무슨일이 일어나도 ‘괜찮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천주의의 문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따라오는 행동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뭐 다 잘 될꺼야’라고 말하고는 ‘끝’입니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낙천주의입니다. 

그러나 ‘낙관주의’는 다릅니다. 낙관주의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며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냅니다. 이것이 ‘낙관 주의’입니다. ‘어떻게 되겠지 뭐’라는 식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하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삶의 태도가 ‘낙관주의’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이렇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자’는 거죠.

우리의 현실이 어두울 수 있습니다. 앞이 안보일 수 있습니다. 끝장난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합니다’그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내 안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분노가 쌓이면 운동을 하던지, 취미 생활을 하던지, 영화를 보던지... 여하튼 뭔가를 하면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낙관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잃지 맙시다!

 

3. ‘에네르게이아(energeia)를 살자.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는 단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리스가 한 말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현실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현재’입니다. ‘에네르게이아’와 반대되는 단어가 ‘디나미스’(dynamis)인데, 한국어로 ‘가능태’로 번역됩니다. 디나미스는 ‘목적론적 운동’을 뜻하는 단어로, 쉽게 말하면 ‘미래’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미래가 중요할까요? 현재가 중요할까요? 너무 철학적인 질문인가요? 정답은, 둘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바른 목적과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가 뒷받침해주면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듯이, 우리의 미래는 현재라는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나의 미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현재’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보십시오.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해 선조들보다 더 편리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더 ‘행복’해 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 우리는 이전보다 더 풍족해지긴 했지만 더 행복해지진 못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디나미스’를 위해 ‘에네르게이아’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등산’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공원을 걷는 ‘산책’이라고 보십니까? 만약 우리가 인생을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등산’이라고 본다면, 산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는 현재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공원을 도는 ‘산책’이라 여긴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오손도손 이야기도 나누며,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새싹에 한눈도 팔면서 한 발 한 발 편안한 마음으로 내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속원 여러분, 언제 우리에게 행복이 주어질까요? 언제 우리는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 지금 나에게 주어진 가족, 지금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가 아닐까요!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6:34)

주님이 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그토록 우리에게 주고자하셨던 ‘자유’가 우리 안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자유하게 하소서.

2. 어려움 속에 있는 속원들을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속장

*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