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제자훈련 > 속회공과


컨텐츠페이지.jpg
총 게시물 64건, 최근 0 건
   

19년 5월 속회공과 - 자유(8) 타자로 부터 자유(2)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9-05-04 (토) 22:45 조회 : 54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드신 적 있나요?

* 성경 - 누가복음2:41-50

* 말씀나눔 : ‘타자’(他者)로부터 자유 (2015 3 5주 주일설교)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미국 또한 피의 댓가로 얻은 자유의 결과물입니다. 영적인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선조들이 피로 물려준 육적인 자유,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신 영적인 자유를 계속해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은 대등(對等)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열(序列,rank) 따지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Gender)이라는 서열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우리 남자들은 그런 말 자주 했습니다. “여자가 뭘 안다고 그래”. 물론 지금은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오신 분은 안계시죠^^ 그랬다간 뼈도 못추리니까요.

‘나이’라는 서열도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신사동4거리에서 택시기사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잠시 본적 있습니다. 서로 멱살 잡으면서 제일 먼저 뭘 물어볼까요? “야 너 몇 살이야?”누가 뭘 잘못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살 먹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또 그렇게 댓구하죠. “나이 많으면 다야?

‘학력’이라는 서열도 있습니다. 고졸인지 대졸인지. 어느 대학 출신인지. 국내파인지 유학파인지.

심지어 한국에는 ‘자동차’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호텔 정문에 가면 적어도3,000 cc 이상되는 벤츠나 에쿠스 정도는 돼야 주차요원들이 문도 열어주고 주차도 해줍니다. 작은 경차 가지고 가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차 빼”라고 합니다.

물론 장유유서(長幼有序)와 같이 어른을 공경하는 것 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권력이 되고, 직급이 권력이 되고, 재산이 권력이 되고, 학벌이 권력이 되서 사람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조금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서구 사회로 탈출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저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고 있고, 남미의 수많은 젊은이들도 차단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관계를 수직이나 상하 관계로 보는 것은 인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은 파격적인 행보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던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야”“누구든지 이 작은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 바다에 던져지게 될 거야”

예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숫자에도 들지 못했던 여인들도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병자들도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대등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이에 대한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힘이 있는 자리에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대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그 권력으로 타인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모든 사람은 대등하다’는 사실을 깨우치십시오. 그래야 권력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인권과 자유를 지키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모든 사람은 대등합니다.

 

2. 원인이 아니라 목적에 초점을 맞춰라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찾는데 집중합니다. 물론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었겠죠!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원인을 찾는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원인을 찾는 것보다 훤씬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들은 집에서 화()를 자주 내곤 하셨습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밥상을 엎곤 했었죠! 물론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그렇지 않죠. 지금도 그러면 곧바로 911에 끌려갑니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들은 그때 왜 집에만 들어오면 사소한 것 가지고 불같이 화를 내곤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화를 내면 아내는 남편의 비유를 맞춰야 하고, 아이들도 아빠의 눈치를 살펴야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화를 내면 집안의 모든 것을 ‘통제’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통제’가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화’라는 수단을 사용한거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결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데, 첫째아이는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혼자 독차지 하고 있던 지위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엄마가 안볼 때 동생을 서서히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요? 엄마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동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습니다. 엄마 아빠 ‘사랑’입니다. 빼앗긴 사랑을 되찾아 오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듯 ‘원인’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답이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면 현재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초점을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옮겨와야 합니다. 과거는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미래는 ‘내가 현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아니라 바꿀 수 있는 미래에 주목하며 삽시다. 그럴 때 ‘타자’에게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3. 자립(自立)하라

사람 ‘인’()이라는 글자는, 결국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각자가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자립”(自立)이라고 합니다. 자립한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가정이 이뤄야 그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고, 그런 가정들이 모여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사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예수’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요셉과 마리아가 알아차리고 급히 뒤로 예루살렘까지 다시 되돌아 왔는데,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뭐하고 계셨습니까?

맞습니다. 성전에 있는 율법학자들과 대담(對談)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예수께 묻습니다. “얘야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니?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알아?”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2:49). 예수님의 이 대답은 어찌보면 부모님께 공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 ‘어찌보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일까요?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먼저 유대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데요, 이스라엘에서 성인으로 인정되는 나이가13세 전후입니다. 그리고 이때 성인식을 치루는데, 유대 성인식을 히브리어로 ‘바르 미쯔바’라 합니다. 그때 유월절을 지키는 행렬은 친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났는데,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누어서 출발하게 됩니다. 성인 남자들이 맨 앞과 뒤를 맡고, 그 중간에 여자와 노인과 아이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보통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3,4일이 걸렸는데, 출발 할 때는 12살이었지만,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 올 때 는 이제 13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3살이 된 남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는 자리 배치에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는 중간에서 보호를 받고 갔지만, 돌아 올 때는 성인이기에 맨 앞, 아니면 맨 뒤에 서서 여자와 아이들과 노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당연히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맨 앞이나 뒤에 있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룻길을 마치고 인원파악해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성인이면 이젠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소신과 가치관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여기까지가 예수님의 마지막 유년기입니다. 그리고 13살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30살까지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제는 스스로 설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유(自由)하려면 자립(自立)해야 합니다. 스스로 서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나가는 법도 배워가야 하고,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관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 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면, 커서도 의존적인 성인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왜인가요? 아이가 스스로 부딪혀가며 내공을 쌓아가야 하는데, 엄마가 나서서 아빠가 나서서 장애물들을 다 치워줬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런 부모를 ‘제설기 부모’라고 한다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찾았습니다. 누구를? ‘참 아버지’를.

타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내 삶의 목표와 이정표를 찾으십시오.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고 의존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가치관과 신념을 키우십시오.  예수님 같이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 동일하고 우리를 끝까지 지지해주는 영원한 이정표, “참 아버지”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우리에게 참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토록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안에 거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자유하게 하소서.

2. 어려움 속에 있는 속원들을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속장

* 주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