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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6월 속회공과 - 용서(1) 평강으로 가는 길

글쓴이 : 네이퍼빌KUM 날짜 : 2019-06-01 (토) 23:31 조회 : 44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누군가를 용서해 본 경험 있나요?

* 성경 - 요한복음20 19-23

* 말씀나눔 : ‘용서’(1) “평강으로 가는 길”(2016 41주 주일설교)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신 뒤 첫번째 던지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19).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샬롬’이라는 말은 던지셨을까요?

아마 제자들의 마음이 지금 편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믿고 따랐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비명횡사(非命橫死)했는데, 그것도 정치범들이나 처형시키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는데 어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샬롬’으로 인사 하신 뒤,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절을 보면 더 수수께끼 같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0:23).

이렇게 오늘 본문에는 ‘평강’과 ‘성령’과 ‘용서’라는 단어가 이어서 나오고 있는데, 이 세 단어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1. 평강은 성령의 열매이다. 

얼마 전 신문에 각 나라 사람들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한국인들이 우선시하는 것과 미국인들이 우선시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인생에서 최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맞습니다. 돈입니다. 한국 사람들 ‘돈’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미국인들이 가장 최우선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평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시카고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이 최우선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둘 다랍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니까 따지지는 마십시오^^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17:1)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또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마음이 편해야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평안’은 어디에 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5:22,23)

오늘 예수님이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평강’을 말씀하신 뒤, 입을 열어 숨을 내쉬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과 성령은 받은 뒤의 제자들의 모습은180도 다릅니다. 성령을 받기 전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하는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뒤에는 어떻게 변합니까?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창검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누가 들을까봐 소리 내어 기도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월절을 지키러 왔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저들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저들 마음속에 두려움이나 불안이 있었다면 결코 그런 일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들 마음속에 담대함과 ‘평강’이 가득했기에 지금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평강’은 누가 주신 것일까요? 맞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은 성령님께 속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사자 굴에서도 평화롭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평강을 유지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순간에도 저들의 입에서는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예수님은 뭐하고 계셨습니까?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 잠을 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이 주시는 ‘평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도 성령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2. 용서할 때 평강이 찾아온다.

‘용서’라는 단어는 머리로 이해도 되고 입으로 내 뱉을 수도 있지만, 이 단어를 실천하며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용서”

 혹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분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당한 대로 갚아줄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밤잠을 설치는 분이 계십니까? 그때 일만 생각하면 속이 끓어 오르는 분이 계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용서’를 통해 그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으시길 권면합니다.

그러면 왜 용서해야 할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용서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때만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결코 내 삶에 평강이 찾아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왕은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멋진 젊은이가 여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에 무너지고 말죠.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물론 이 노래가 좀 아쉽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래하지 말고 둘 다 천천이라고 하던지, 둘 다 만만이라고 했으면 사울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 여인들은 말씀을 잘하셔야 합니다. 남자들은 속이 좁아서 이렇게 사소한 한 마디에 삐집니다. 절대로 여러분 집에 있는 남자를 다른 남자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칭찬 많이 해주시고 기를 세워주십시오. 그러면 남자들은 신나서 설거지 합니다.^^

여하튼 이 한마디를 삼키지 못해서 그는 왕좌를 잃고 맙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요나단’과의 관계도 틀어져버리죠! 그러다 결국 자신도 죽고 아들들도 죽고 맙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걸어가다가 다리가 부러지던가요? 번개 맞아 급사하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두 발 뻗고 잠도 잘 자고 소화도 잘 시키면서 잘 삽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자기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결국 누구만 손해인가요? 맞습니다. ‘나’만 손해입니다. 사울도 그런 마음 품고 사니까 마음이 점점 삐뚤어지고, 삐뚤어진 마음속에 사단이 또아리를 틀고 맙니다. 악신의 둥지가 되어 결국 그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면 결국 피해 보는 것은 결국 ‘나’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 털어 버려야 내 심령에 안정이 찾아오고, 그렇게 안정된 심령의 토양 위에 내 인격과 감성이 바르게 자라갈 수 있으니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어찌보면 사울의 경우보다 더 심하죠! 사울은 단지 여인들의 입에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지만, 요셉의 경우는 지금 형들에 의해 생명까지 위협을 받고 있잖아요! 더구나 당시 요셉은 감수성이 민감한 10대였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그 상처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사울처럼 가슴속에 ‘꿍’하고 담아 뒀을까요? ‘다음에 두고보자’는 앙갚음으로 가득했을까요? 물론 사람인지라 억울함도 있고, 미워하는 마음도 들었겠죠.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앙갚음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자신을 삼키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상처를 자신을 성숙하게 만드는 도구로 승화 시켜 나가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0)

멋지지 않습니까! 비록 형들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형들이 뿌려놓은 가라지에 그는 결코 발목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이 고백이 증명해 주고, 상처 받은 이후의 삶이 증명해 줍니다. 만약 그의 마음이 원수 맺음으로 가득했다면 보디발의 집에서 유혹 받을 때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잘 보여서 어떻게든 그 힘을 이용해서 형들에게 원수 갚으려고 했겠죠!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년을 갇혀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마음이 앙갚음으로 가득했다면 그의 눈빛과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을 텐데, 그렇게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면 간수장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마음에 들기는커녕 앞으로 무슨 일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서 더 깊은 독방에 던져졌겠죠!

우리의 마음이 사울이 마음이 아니라 요셉의 마음 되길 소망합니다.

 

3. 성령님이 용서하게 하신다.

우리 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도 아는데 용서가 안돼요!’맞습니다. 그리고 이해합니다. 우리 삶에는 가끔 용서가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용서가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10:27)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신 말씀인데요, ‘부자가 낙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고, 어렵고, 안되는 용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누구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 억지로 하지는 마십시오. ‘억지로 하는 용서’는 오히려 부작용만 가져옵니다. 억지로 하지마시고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내 보이십시오. 아픈데 안 아픈척 하지도 마십시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십시오. 속히 아물기를 너무 재촉하지도 마십시오. 어떤 용서는 평생이 걸리는 용서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내 마음속에 아직 용서가 안되는 상처들이 남아 있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을 치유하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온전한 치료자이신 하나님께 내 아픔과 상처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럴 때 성령 하나님이 어루 만지십니다

이 시간 때에 따라 임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이 우리의 아픈 부위를 덮어주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 더욱 ‘평안’으로 가득해 가는 우리 속회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평안케 하소서.

2. 어려움 속에 있는 속원들을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3. 전도의 문을 열어 주사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속회가 부흥하게 하소서.

 

* 속회헌금 - 찬송________ 

* 헌금기도 - 인도자

* 광고- 속장

* 주기도문